수트를 벗은 노년의 아이언맨 : 실패하지 않을 그의 행보,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

2014. 8. 13. 16:33

2013년 12월 31일은 어떤 정치인의 12년 간 임기 마지막 날이었다. 그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이날 자정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는 커다란 시계가 걸려있었는데, 이 시계는 결국 예정된 시간을 맞이했다. 이렇게 새해를 맞은 그는 만으로 일흔 두 살의 백수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까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정치인이었으나, 이제는 전세계에서 16번째로 부자인 사람일 뿐이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뉴욕 전 시장이자 블룸버그 통신(기업의 정식명칭은 Bloomberg L.P.)의 창립자인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이다. 

마이클 블룸버그에 대한 대중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오만한 플루토크랏(Plutocrat: 그리스어로 부를 뜻하는 Plutos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가 결합,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초부유층을 의미함)이라고 비판하지만, 한편에서는 그를 능력있는 기업인이자 정치인, 무엇보다 향후의 행보가 기대되는 자선가(philanthropist)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또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자신의 막대한 부를 아낌없이 꾸준히 기부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수트를 입고 싸울 수 없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세상을 구하려고 할까? 젊은 아이언맨이 엘론 머스크라면 노년의 아이언맨은 블룸버그와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부를 이룬 뒤 경영인을 뒤로하고 손꼽히는 정치인으로, 또 다시 자선가로 변신하는 모습을 이보다 더 화려하게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 같은 임팩트 히어로(Impact Hero), 이번 IBR 리더스 스토리는 마이클 블룸버그를 조명해 본다. 

 

블룸버그 프로필 요약

  • 나이: 72

  • 거주지: 뉴욕

  • 추정 자산: 328억달러

  • 전세계 부자 순위: 16위 (미국 내 11위, 2014년 5월 기준)

  • 전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9위

  • 뉴욕시장직 수행 기간: 2002년 1월 1일~2013년 12월 31일

  • 일생 동안 기부한 금액 총액: 25억달러

 

그는 어떻게 그만한 부자가 되었나

블룸버그의 프로필을 보고 있으면 숫자감각이 없어진다. 그는 뉴욕시장직을 수행하는 12년 동안 연간 약 22만달러 정도로 알려진 시장 연봉을 받지 않고, 상징적인 금액인 1달러만  연봉으로 수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산은 2013년-14년의 기간 동안 무려 60억 달러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전세계 최고의 금융미디어 그룹인 블룸버그 통신의 창업자이자 지분의 88%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룸버그 통신은 도대체 무엇을 팔며, 그는 어떻게 이만한 부자가 되었을까?

마이클 블룸버그는 1942년 보스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민자 출신으로 부동산 거래업자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미국인 주부였다. 1964년 전기공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존스홉킨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바로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MBA 과정을 밟았으며, 1966년부터 당시 미국의 4대 투자 은행이었던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살로몬 브라더스는 1998년 씨티그룹에 인수된다.) 블룸버그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주식 거래 및 세일즈 부문의 제너럴 파트너로 승진을 하지만 불같은 성격으로 일종의 유배를 가게 되는데, 금융/투자업에서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기술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오늘날에 비하면 매우 미미했던 당시 그는 회사의 컴퓨터 및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1981년, 살로몬 브라더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광물 트레이딩 회사였던 필립 브라더스(Philip Brothers)에 인수가 된다. 블룸버그는 이에 반대하다 15년간 일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는데, 당시 퇴직금으로 (오늘날에도 어마어마한 금액인) 1천만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서른 아홉살이었고, 그는 자신과 같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직장동료들과 함께 Innovative Market Systems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블룸버그는 살로몬 브라더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당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던 정보 기술을 접목시켜 기업 재무 및 경제 정보를 높은 퀄리티로 가공하여 제공한다면 월스트리트로 위시되는 투자자 커뮤니티가 이에 대해 충분한 가격을 지불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뱅커들이 소수의 클라이언트만을 상대하면서 이들의 자산을 관리하고 불려주던 엘리트 중심의 투자에서 이제는 다양한 다수의 시장 참가자들 간 경쟁적이고 신속한 트레이딩을 통해 일종의 투기(speculation) 차익을 실현하는 쪽으로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블룸버그가 제공하는 방대한 데이터에 기반한 빠르고 활용이 쉬운 정보 솔루션이 필수적이었다. (현재 전세계 주식시장, 금리, 채권, 투자 상품, 환율 등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통합 데이터 플랫폼으로 성장한 블룸버그 터미널은 그 활용기능이 3만여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1982년 그의 첫 고객인 메릴린치는 오늘날 블룸버그 터미널의 전신인 Market Masters 터미널 22개를 설치하며 3천만 달러를 들여 지분 30%를 인수한다. 회사는 1987년 블룸버그로 명칭을 바꾸고, 1990년에는 이미 8천 여개의 터미널을 투자자들에게 공급하게 된다. (블룸버그는 이때 메릴린치의 지분을 다시 사들인다.)  

그림 1. 블룸버그 솔루션 차트 이미지 (출처: 블룸버그 웹사이트)

유한회사인 블룸버그 통신은 기업 공개의 의무를 지지 않으며, 따라서 블룸버그 그룹의 매출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용 단말기, 컴퓨터, 핸드폰 어플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블룸버그 터미널은 170여개국에 약 30여만대 정도가 이용되고 있으며, 터미널 1대의 연간 사용료는 우리 돈 약 4천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용료가 왠만한 대기업 연봉과 유사한 금액이기 때문에 일부는 블룸버그 터미널을 ‘블대리’로 부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4천만원에 30만을 곱하면 사용료에서만 약 12조 언저리의 매출 발생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블룸버그의 텔레비전, 라디오 채널, 웹미디어 등의 다른 사업 영역을 감안하면, 연봉 1달러를 받아도 전체 자산 평가액이 줄어들기는 커녕 수천억씩 늘어나는 현상은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블룸버그, 뉴욕에 입성하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던 블룸버그는 2001년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였으나, 초반에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낮은 지지도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는 동성 결혼, 임신 중절 수술, 총기 규제 등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갖고 평생을 민주당원으로 등록하고 있었지만, 민주당 당내 경선(primary) 선거에 후보들이 많이 몰리자 11월 선거를 불과 몇 달 앞두고 당적을 공화당으로 아예 옮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까지 블룸버그의 승산은 크게 높지 않았다. 

당시 뉴욕의 시장은 재선에 성공한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였는데, 그 또한 그닥 인기가 높은 시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테러로 무너지면서 큰 변화가 따른다. 폐허가 된 재난 현장을 직접 누비며 소방관들 사이에서 지시를 내리는 강경하고 터프한 줄리아니의 모습에 뉴욕 시민과 미국 전체가 열광했고, 9월에 있었던 시장 후보의 당내 경선이 테러와 관련한 언론보도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40% 초반에 머물던 줄리아니의 지지도는 80%까지 올라갔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줄리아니는 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한 블룸버그의 유세에 적극 가담했으며, 블룸버그는 혼란에 빠진 뉴욕을 재정비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성숙한 기업인의 이미지를 내세워 11월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이로서 2002년부터 12년에 달하는 그의 뉴욕 시장 경력이 펼쳐진다. 

시장으로서 블룸버그의 성과를 얘기하기전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블룸버그가 뉴욕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개인 재산으로 충당한 비용에 관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열대어를 좋아해서 시청에 대형 수족관을 설치한 그는 이에 대한 청소 비용을 매주 지출했는데, 이는 12년 동안 총 62,400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또 건강한 아침 식사를 주장하면서 매일 자신의 스태프들이 아침에 커피와 베이글, 샐러드, 과일 등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데에는 89만 달러, 정작 자신이 입주하지 않았던 시장 사택 리노베이션에 5백만 달러, 출장을 다닐 때마다 자신의 스태프들을 함께 자신의 전용기에 태우는데 6백만 달러 등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를 자신과 주변 사람의 편의만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예술, 시민, 보건, 문화 활동 조직들에게 총 2억 6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오디오 가이드와 인터넷을 구비하는 데서부터 뉴욕 내 흑인 및 라티노 취약계층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 개발까지 다양한 활동에 쓰였다. 그는 3번의 선거를 위해 선거 비용으로도 2억 7천만 달러 정도를 쓴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그가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스태프들의 복지 비용과 뉴욕 내 다양한 기관에 기부한 금액을 모두 합하면 6억 5천만 달러에 달하며,(심지어 이는 매우 보수적인 추정치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독특한 기록을 보유한다. 

 

탄산음료 금지부터 하이 라인 공원 개발까지 

블룸버그는 재임 기간 내내 평균적으로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며, 성공적으로 직무를 수행한 시장으로 평가된다. 그는 비록 공화당원으로 처음 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이후 선거에서부터는 무소속으로 출마를 했으며, 동성애자들의 권리, 임신 중절, 총기 규제, 공공 규제, 환경 등과 같은 논란이 첨예한 이슈에 대해 진보적 성향이 강한 뉴욕 시민들과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다. 

블룸버그의 성과는 여러 영역에서 드러난다. 우선 그는 그 어떤 행정가나 정치인보다 공공보건 이슈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논란을 일으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던 인물이다. 예를 들어, 그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에서의 흡연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식당의 위생 규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또 비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칼로리 표시를 의무화시킨 데에 더해 특정 용량 이상의, 소위 슈퍼사이즈의 탄산 음료 판매를 금지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논란만 컸지 많은 이들이 지지를 보내지 않아 결국은 법원 판결로 무효화 되었던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탄산음료의 사이즈가 지난 몇 십년간 지속적으로 커져왔음을 지적하며, 슈퍼사이즈가 없어짐으로써 음료의 사이즈가 전체적으로 조정됨에 따라 사람들의 탄산음료 섭취량이 줄어들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그가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정책과 규제를 남발하며, 뉴욕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행동 실험을 진행했다고 비판하지만, 다수는 그로 인해 건강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이 제고되었으며, 많은 행동 변화가 일어났다고 평한다. 또 환경 영역에 대해서도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전력 생산에서 천연 가스 사용 비율을 늘림으로써 도시의 탄소 발자국을 6년동안 16%정도 감소시켰으며, 자전거 도로를 도시 전체에 설치했고, CitiBike와 같은 공유 자전거 프로그램을 런칭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림 2. 블룸버그의 탄산음료 금지 이슈를 유머러스하게 그린 뉴요커 카툰(출처)

또 성공한 기업인답게 경제 영역의 성과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012년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실패했지만, 당시에 세웠던 도시 개발 계획들을 (때때로는 개인적인 힘을 들여) 진행함으로써 임대 주택 건설과 지하철 연장, 맨하탄의 수변 지역 개발 등과 같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거나 마무리하였다. 성공적인 도시 자원의 재개발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하이 라인(High Line) 개발 프로젝트도 블룸버그의 지지가 뒷받침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임 시장인 줄리아니의 승인 하에 철거를 앞두고 있었던 고가 화물철로를 보존하자는 지역 비영리 기관의 공원 개발안을 그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블룸버그는 철거 결정을 취소하고 오히려 시 정부를 통해 개발 예산을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공장과 산업시설로 대표되는 맨하탄의 과거 모습을 현대에 세련되고 감성적으로 부활시킨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블룸버그의 재임 기간동안 뉴욕의 관광객수는 크게 증가해 그 전에는 연간 3천만명이 약간 넘는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5천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는 시의 예산 관리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가 호황일 때 예산을 잘 비축해둠으로써 결과적으로 경기 침체의 영향을 덜 받았다는 것이 대체의 요약이다. 특히 2009년 경기 침체 이후의 성과가 두드러지는데, 2011년 이후 2013년까지 뉴욕 내 민간 부문의 일자리 증가율은 미국 평균인 4%에 비해 매년 10%를 웃돈 것으로 조사된다. 또 그는 장기적으로 미국 서부, 특히 실리콘 밸리와 경쟁하며 고부가가치의 기술 관련 일자리와 인재를 뉴욕에 유치하기 위해 루즈벨트 섬 개발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2011년에 발표된 이 계획에 따르면, 섬 전체가 엘리트 대학의 엔지니어링 과학 전문 캠퍼스를 중심으로 하는 하이테크 지역으로 개발되며 그 파트너로는 코넬 대학이 선정되어 현재 코넬의 뉴욕 기술 캠퍼스(Cornell NYC Tech Campus)가 2017년 오픈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다. 

블룸버그가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성과는 이 외에도 범죄 영역이 있다.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뉴욕의 강간 범죄율은 25% 감소, 도난은 28%, 절도 46%, 살인 36%씩 감소된 것으로 조사되며, 특히 2012년은 뉴욕 역사상 가장 낮은 수치인 419건의 살인범죄가 일어났다고 한다. 1990년대에 연간 2,200건이 넘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블룸버그는 뉴욕을 더욱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우며, 따라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도시로 뉴욕을 만들었다고 자평한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중산층들의 도시 이탈율이 낮아졌고, 이들이 자녀들을 공립학교에 등록시키는 비율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했음을 내세우며, 자신에 대한 비판에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변화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던, 사람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는 효율적이고 정직한 정부"를 가져다준 시장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림 3. 뉴욕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하이라인 파크 (출처: 하이라인 파크 웹사이트)

뒤따르는 그림자

그러나 블룸버그가 모든 분야에서 만능은 아니었다. 특히 교육 영역의 성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는 주정부를 설득해서 공교육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아 교육 의회와 교사 노조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는 차터 스쿨(charter school, 자율형 공립학교로 알려져있으며, 주정부의 교육예산을 받아 설립되나 커리큘럼의 자율적 운영, 학교 내 특정 교육 부분 강화, 교사의 엄격한 성과 평가 등으로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장점을 차용한 형태의 대안학교)을 확대하고, 기존에 성과가 좋지 않았던 공립학교들을 폐쇄시켰다. 이에 교사들은 해당 지역 내 빈곤이나 소득 수준과 같은 사회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성적만으로 학생과 자신들을 평가한다고 반발하였다. 블룸버그는 2005년 이후 뉴욕의 고교 졸업률이 35% 증가했고, 중퇴율은 반으로 줄어 11%가 되었다고 내세우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학생들의 영어 및 수학 성과 평가 점수가 하락하였다고 주장하며, 객관식 시험과 암기 위주의 교육의 확대를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한 블룸버그의 재임기간 동안 한층 강화된 소위 “불심검문”(stop-and-frisk, 우리말로는 정지 및 수색으로 번역된다) 정책은 범죄율 감소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인권 침해의 소지 때문에 논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 정책은 1990년대부터 뉴욕시가 꾸준히 벌인 “범죄와의 전쟁"의 대표적인 요소로, 특정 혐의 없이도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의심가는 시민들을 세워 질문을 하고 몸 수색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보다 흑인과 히스패닉과 같은 소수 인종 시민들의 검문율이 더 높게 나타나면서 많은 인권단체들은 지속적으로 이 정책이 인종차별을 강화하고 있다며 비판하였으며 나아가 해당 정책은 2013년에는 뉴욕 연방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불심검문 조치가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특히 청소년들의 총기 오남용을 방지하는 데 증명되었다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그림 4. 뉴욕의 강화된 불심검문에 반발하는 시위자들 (출처: 뉴욕타임즈)

한편 일반적으로 중산층 그리고 그 이상의 소득수준을 갖춘 시민들에게 블룸버그는 꾸준히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들은 블룸버그가 엄청난 재력가이기 때문에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 및 이익집단 그룹의 이해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며 그로 인해 그가 뉴욕 시를 위해 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다양한 코즈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블룸버그 덕택에 뉴욕 내 많은 비영리 조직들의 경영 여건이 좋아진 것을 장점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조금 형편이 어려운 유권자들에게 블룸버그는 다르게 인식되기도 하였다. 뉴욕 내 빈곤과 관련된 지표들이 그대로거나 오히려 후행했기 때문이다. Center for Economic Opportunity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으로 뉴요커 다섯명 중 한 명은 최저생계선(poverty line) 이하의 삶을 살고 있으며, 전체의 25%는 그 수준을 약간 넘기는 정도라고 한다. 또다른 연구는 식료품 지원 쿠폰(food stamp)을 통해 생활을 꾸리는 사람들이 2007년 대비 ⅔ 정도가 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뉴욕의 소득 격차 또한 문제로 꼽힌다. 이는 미국의 모든 대도시들이 겪고 있는 현상이긴 하지만, 연간 5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상위 계층의 소득이 뉴욕의 전체 소득 중 차지하는 비율이 중 1980년 12%였던데 비해 현재는 39% 수준이다. 미국의 전체 도시 평균이 20% 정도임을 감안하면, 뉴욕 내 주민 간 소득 격차의 문제가 심각함을 알 수 있다. 

빈곤 및 소득의 문제는 매우 거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행정에서 그 모든 원인을 찾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겠으나, 위와 같이 블룸버그에 대해서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그는 공개적인 발언을 통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사람들의 비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시장으로서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say no) 것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아무런 비용 없이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예스,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을 신문에서 비판하고, 손가락질하고, 패러이드 때 소리를 지르는 상황에서 노,라고 얘기하긴 쉽지 않다.” 인권이나 교육 문제에서는 비판이 많았지만, 기업 커뮤니티에서는 블룸버그 덕분에 시와 기업, 각종 산업조직들 간의 원활했던 파트너십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크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있게 12년 동안 정식으로 휴가를 가지 않았다고 밝힐만큼, 또 두 번의 대선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출마 권유가 있었음에도 이를 물리치고 뉴욕에 헌신했다는 사실이다.   

그림 5. 블룸버그 시대의 종언을 그린 뉴요커의 표지 “The Last Straw” (출처: 뉴요커)

다시, 새로운 시작

화려했던 시장 생활을 뒤로하고 뉴욕 시청을 떠나는 블룸버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음 행보를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그는 잠깐의 휴가를 즐긴 뒤 자신이 기존에 지지했던 코즈들에 대한 후원 및 각종 활동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만 밝혔을 뿐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은 대체로 환경, 총기 규제, 정부 혁신, 이민자 문제, 공공 보건 등이 꼽힌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기도 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전문적인 투자자나 교수가 되는데에 관심이 없으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자신이 설립했던 특정 코즈와 관련된 조직 활동을 하며, 빌 클린턴 및 빌 게이츠처럼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들처럼 기부 서약(Giving Pledge)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Bloomberg Philanthropies라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모든 재산과 회사 지분을 사회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시장직에서 물러난지 딱 한달이 되는 2014년 1월 31일, 반기문 UN 총장이 임명한 도시와 기후변화 특사직(Special Envoy for Cities and Climate Change)을 맡아, 도시의 환경 영향 감소 및 변화라는 아젠다에 대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는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는 전통적인 자선 영역에도 꾸준히 후원을 해왔는데, 특히 자신의 모교인 존스홉킨스 대학에 1964년 5달러를 시작으로 매년 기부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블룸버그는 2013년에만 3억 5천만 달러를 학교에 새로 기부하면서 환경과 공공보건에 관련한 연구에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존스홉킨스 대학에 기부한 누적액만 현재 11억 달러에 달하며 이는 개인 1인의 대학 기부금을 꼽았을 때 미국 내 1위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신만의 방법과 자원을 동원하여 자선가의 길을 걷는 그의 행보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블룸버그는 개인의 자선(private philanthropy)이 가질 수 있는 중요성을 종종 역설하곤 하는데, 그에 따르면 정부 예산과 같은 공공의 돈(public money)은 납세자의 돈이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최대의 효과가 증명된 곳에 적절하게 쓰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개인의 자선이 오히려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밝히며, 소위 “예시 프로젝트"(demonstration project)를 펀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과학의 비유를 들면서, 실험의 의의는 예상한 가정을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결과에 이르는 반복과 실패의 과정에서 특정 설계 혹은 경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해당 가능성을 제거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떤 요소가 작동하는지 만큼이나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를 아는데도 많은 자원이 소요됨을 지적하며, 이 과정에서 개인 자선을 통해 투입되는 자금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껏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미국 사회의 난제를 건드리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 자선가로서의 블룸버그는 기업가와 시장을 할 때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이고 담대한 활동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닌게 아니라, 블룸버그는 자선 영역에서 잘 알려져있는 다른 인물들이 이제껏 건드리지(?) 않았던 조금 특이한 이슈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바로 미국의 총기 문제이다. 

미국은 일반 시민의 총기류 소지가 허용된 덕택에 우리나라의 뉴스에도 심심치 않게 총과 관련된 사고가 보도될 정도로 총기 규제 문제로 골치를 겪고 있다. 지난 5월에만 하더라도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의 대학 안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로 일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2012년 12월에 발생한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은 어린이와 교사를 포함한 3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외에도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총기 관련 사고는 부지기수이며, 종종 발생하는 시민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 혹은 시민들간의 정당방위 논란 또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총기류 소지의 용이성과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총기 소지의 권리는, 개척시대에 시민의 자위권을 보장해준 수정 헌법 2조가 보장해주고 있는 탓에 미국의 역사 및 헌법 수호라는 측면과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미국 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 NRA)가 있다. NRA는 1871년 창립된 이후 화기류에 대한 활용능력, 안전, 소유권(competency, safety, ownership) 등의 이슈에 대한 인식제고 활동과 더불어 사냥과 사격과 같은 스포츠와 자기 보호(self-defense) 훈련 교육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는 비영리 조직이다. 이들이 제공하는 각종 사격 훈련과 편지쓰기, 스피치 대회와 같은 이벤트들은 이에 참여하는 어린이, 청소년들로 하여금 총기를 친숙하게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이들의 명시적 활동은 관련 잡지 발행, 대형 이벤트 개최, 정치인 및 관련 조직에 대한 후원 활동까지를 포함하는데, 문제는 NRA가 정기적인 회비를 내는 회원의 수가 2013년 기준 5백만명을 넘는 미국 최대의 이익단체이자 가장 강력한 로비집단이라는 점이다. 

NRA는 Political Victory Fund를 통해 미국 내 다양한 레벨의 정치인들(상하원의원, 시장, 시의원 등)에게 선거자금을 대고, 유사 조직들의 대중 활동을 후원하는 등, 티비와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에 자신들을 직접 노출하는 대신 치밀한 로비활동 및 시민 동원을 통해 자신들의 아젠다를 관철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NRA의 넓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을까봐 총기 규제와 관련된 법안이 나와도 이에 섣불리 동의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와 반대로 총기 관련 규제를 완화하자는 입장을 표명하는 정치인들은 이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운동을 보다 쉽게 진행한다. 끊임없이 총기와 관련된 사건들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의 총기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바로 NRA와 같은 조직들의 활동, 그리고 이로 인해 누적되어 가는 시민들의 불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강력한 총기 규제의 중요성을 믿는 블룸버그는 2006년 당시 보스턴 시장이었던 토마스 메니노(Thomas Menino)와 자신을 포함해 총 15명의 시장들과 함께 MAIG(Mayors Against Illegal Guns, 불법적 총기류에 반대하는 시장들)라는 단체를 조직하는 것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MAIG는 오늘날 미국 전역에서 보다 강력한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천여명의 전현직 시장들이 가입한 단체로 성장하였는데, 이 조직에 가입된 정치인들은 화기류를 구매할 때 구매자의 신상 조회를 강화하는 것을 그들의 행정 정책에 반영하자는 목표를 공유하며, 민주당과 공화당을 구분하지 않는 초당파적(bipartisan, 정당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MAIG는 로비를 통해 미국 내 가장 큰 총기 유통/판매업체인 월마트와 Responsible Firearms Retailer Partnership을 체결하는데, 이 파트너십을 체결하면 리테일러(판매업자)는 자발적으로 파트너십이 명시하는 10가지 조약(10 point)을 따르게 된다. 이 10가지 조약은 총기 거래시 영상 녹화 의무화, 판매원의 신원 조사, 총기 범죄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조직 및 경고 시스템 확립, 재고 관리, 제품의 철저한 안전 보관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하지만 블룸버그는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시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MAIG 활동을 계속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데에 이어, 2013년 12월에는 Moms Demand Action for Gun Sense in America라는 조직과 MAIG를 중심으로 결성된 Everytown for Gun Safety라는 이니셔티브의 런칭을 후원한다. 이 이니셔티브는 학부모, 경찰관, 교사, 총기 사고의 생존자 및 일반인들을 함께 참여시켜 총기 사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을 줄이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상식적인 법률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이니셔티브는 기존의 총기 규제 강화 움직임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자 한다. 총기 소유 금지 자체가 연방 정부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은 총기 구매자의 신상 정보 조회(background check)의 강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한다. 또한 이들은 NRA의 네트워크 확장 방식을 따라서, 총기 소지에 대한 네거티브 광고를 티비와 라디오에 내보내는데 집중했던 기존 운동들과는 달리, 지역의 풀뿌리 조직과의 연대를 추구하며 가장 중요한 타겟그룹을 학부모, 특히 엄마들로 설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규모 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비일상적인 사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총기가 연루되면 더욱 끔찍해질 수 있는 가정 폭력(domestic violence)과 주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희생되는 예방 가능한 사망사고(preventable death)를 문제 영역으로 삼은 것 또한 이들의 포지셔닝 전략이다. 그리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총기 규제 강화에 찬성하는 유권자들이 투표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은 입법과 행정이 바뀌어야 큰 변화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해당 이니셔티브에 최소 5천만 달러 이상을 후원할 것을 밝혔는데, 이는 총기 이슈와 관계된 단일 조직 후원금액 중 역대 최대 규모이며, NRA가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물량공세 규모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림 6. Everytown for Gun Safety의 페이스북 이미지(출처)

블룸버그 웹사이트를 구글에 검색했을 때 페이지에 뜨는 요약은 다음과 같다. “Michael R. Bloomberg is the 108th Mayor of New York City, Philanthropist, and independent leader on national issues.” 누구나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거나 의견을 달리할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 전혀 주저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뛰어든 일에서, 기업 경영이든, 시정이든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는데 결코 실패한적이 없다. 이제 그는 자선가이자,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신을 실천해 나갈 “독립적인" 리더로서의 행보를 천명하고 그 길을 걷는다. 임팩트 히어로서 블룸버그가 보여줄 활동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다음 자료들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작성자 : ISQ 박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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