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세계 축구선수들의 사회공헌 #1
2012. 2. 10. 12:22
우리의 눈망울을 봐요. 당연히 가능하지! (출처 : http://goo.gl/dGrZa)
축구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축구는, 공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플레이 할 수 있기에 지구 상에 존재하는 스포츠 중 가장 흔한 종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멋진 유니폼을 입고 있든 웃통을 벗고 있든, 몇 십만원 짜리 축구화를 신었든 맨발이든 관계없이 즐겁게 상대편 골대에 공만 차 넣으면 된다!
그런데 축구로 세상을 구한다니? 90년대초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만화 쥬라기 월드컵의 돌발이가 아닌 이상 축구로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축구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sOccket은 전 세계 아동 인구의 25%가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공의 운동에너지를 전기로 변환시켜주는 전기 발전 축구공을 만들어냈다. 하루 종일 공 차고 놀고 집에 와서 연결선 하나만 꽂으면 LED 램프를 사용할 수 있고, 30분 동안 공을 차면 램프를 3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주도면밀한 경제 지원 계획이나 제도적 개선같은 무거운 이야기들보다, 축구를 통해서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 세상을 구할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축구를 통해서 사회적 변화와 지역 재생의 비전을 추구하는 조직들이 늘어나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자, 축구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이들은 바로 프로 축구선수 출신으로서 세상을 구하고 있는 11+2명의 축구쟁이들이다. 그 첫번째로, 공격수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세상을 구하고 있는 축구선수 베스트 11+2 ©임팩트스퀘어
'드록신', 전쟁을 멈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첼시를 전성시대로 이끌며 06/07 및 09/10 시즌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쥔 디디에 드록바. 엄청난 피지컬로 상대 수비수를 무력화시킨 후, 폭발적인 골 결정력으로 상대 골망을 가르고 관중석을 바라보며 ‘나를 경배하라’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그의 별명은 ‘신’, 이른바 ‘드록신’이다(드록신이라는 별명은 디시인사이드의 해외축구갤러리에서 먼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축구 실력만으로 ‘드록신’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드록바가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을 멈추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드록신께서 이 땅에 최초로 축구라는 걸 내려보내시고 마침내 이 땅에 강림하시어 드록력 2004년에 첼시 FC에 들어오시니 첼시가 마침내 EPL 리그 챔피언이 되더라” - 드록신 복음 중 드록기 1절~2절
드록바의 조국인 코트디부아르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사상 최초로 본선에 진출했다. 그는 대표팀의 주장직을 맡아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 9경기에서 무려 10득점을 올리는 골 행진을 선보이며 조국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다. 그러나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 후 오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고, 2005년 10월 당시 10년 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항상 조국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던 그는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경기가 끝난 후 TV 생중계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호소한다.
“여러분, 우리 적어도 1주일 동안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춥시다"
드록바의 진심 어린 호소는 건국 최초로 한 달 간의 휴전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고, 월드컵이 끝난 후인 2007년 드디어 양 진영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내전이 종식되기에 이르렀다.
격동의 내전 상황 속에서 축구로 조국을 하나로 단결시키며 평화를 위한 길을 닦은 코트디부아르의 국민적 영웅, 드록바 (출처:http://goo.gl/4DbqI)
하지만 드록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코트디부아르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2007년에 디디에 드록바 재단을 설립하고 아프리카 전역에 의약품과 식료품, 축구공을 지원하고 유소년 축구팀 육성을 위한 인프라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2009년에는 사재 60억 원을 털어 코트디부아르에 종합병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작했고(안타깝게도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으로 이 병원은 아직 설립되지 못하였다), 2010년 Nike가 주최한 Write the Future # End AIDS의 홍보대사 및 CF 모델로도 활동을 계속 해 오고 있다. ‘드록신’의 행보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최고 연봉의 사나이, 최고의 자선 활동을 벌여 나가다
축구선수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는 누구일까? 지난해 이탈리아 세리에A의 인터 밀란에서 러시아 구단 안지 마하치칼라로 이적한 사무엘 에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최전성기를 보내며 ‘흑표범’ 이란 별명을 얻은 카메룬 국가대표팀의 주장 에투는 무려 311억원의 연봉 계약서에 사인하고, 러시아의 신흥 갑부 구단으로 이적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시급이 무려 500만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투가 “돈에 눈이 멀었다"라는 비난을 받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단순히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축구선수의 길을 택한다면 결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고 큰 자부심이다. 결코 돈이 아니다. 카메룬 국민 모두가 바르셀로나 팬이 됐고, 거리에서 빨간색과 파란색의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너무 행복하다.
- 사무엘 에투(바르셀로나의 선수 시절)
에투는 2006년 3월에 사무엘 에투 재단을 설립하고, “청소년들의 협동 정신을 기르고 능력 계발을 지원한다"는 목표로 Fundesport 라는 유소년 축구 아카데미를 운영해오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여기서 그친다면 시급 500만원을 받을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 사무엘 에투 재단은 에투의 조국 카메룬 전역에 식수, 배수 시스템을 개선하고 통신 설비를 구축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또한 고아 센터를 건립해 아이들에게 보금자리와 재정지원을 하고, 카메룬 정부의 보건부에 최신 앰뷸런스를 지원하는가 하면, HIV/AIDS 등의 질병 예방에 대한 교육과 학문적 연구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한 정부 부처 수준의 활동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자선 활동을 해 나가고 있는 카메룬의 ‘흑표범', 사무엘 에투 (출처 : http://goo.gl/0gPXs)
아직 끝이 아니다. 카메룬 법무부와의 협조 속에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다 경찰에 적발되었는데 10불 밖에 안 되는 court fee를 내지 못해서 감옥에 가는 18세 이하 경범죄 청소년범들에게 그 비용을 대신 내 주고, 이들의 재활 및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카메룬의 감옥은 침대도 없이 바닥에서 자야만 한다고 하는데, 이에 재단은 침대 200개를 감옥에 기부하고 억울하게 구금된 이들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Set’Mobile의 설립을 발표하는 ‘사업가' 사무엘 에투 (출처 : http://goo.gl/x94Gs)
더욱 놀라운 사실은, 최근에는 그가 마치 사회적기업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에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Set’Mobile이라는 이름의 카메룬 내 3번째 이동통신회사의 설립을 발표했다. 에투가 회사 설립을 언론에 발표하자마자 무려 5만 명의 사람들이 USIM 칩을 구매하려 몰려 들었다고 한다.
휴대전화 보급률이 저조한 카메룬에서 전화나 문자, 인터넷 같은 핵심 서비스는 그대로 제공하면서도 전화 구입 비용이나 사용 요금을 대폭 내려 가난한 이들도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이 회사의 목표이다. 유선망 설비조차 부족한 국가에서는 오히려 휴대전화를 먼저 보급하는 것이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이렇게 만들어진 통신 인프라는 엄청난 사회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가 방글라데시에 설립한 그라민폰(GrameenPhone)을 참고할 만하다. 방글라데시의 상황에 맞게끔 빈곤층들도 쉽게 통신 수단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활용해 농산물 매매 장소를 정하고 폰 뱅킹을 하는 등 상거래 진작과 소득 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자, 이쯤되면 그는 최고 연봉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보인다. 그가 또 어떤 자선 활동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계속 기대해보자.
내 인생 후반전의 페널티킥은 실축하지 않겠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탈리아와 브라질의 결승전. 전후반전 동안 승부를 가르지 못한 두 팀은 월드컵 결승전 사상 최초의 승부차기에 돌입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마지막 킥커로 나선 이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던 로베르토 바조. 그러나 그의 마지막 슛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골대를 넘고 넘어 관중석으로 향했고, 결국 브라질에게 우승컵을 내 주고 말았다. 그는 축구 인생 내내 “판타지스타"로 불리우며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지만 이 승부차기 실축은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전설의 음료 에너비트를 기억하는가? 1996년 AC밀란 방한 당시 한국의 광고에 출연했던 로베르토 바조 (출처 : http://goo.gl/jbehB)
그런데 은퇴 후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바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사회/환경 관련 이슈을 홍보하고 기금을 모금하는 전문가로서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아이티 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금 마련 행사,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 조치의 해제에 대한 촉구, 조류 독감 해결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 등에서 자신의 유명세를 충분히 활용해 뛰어난 성과를 보여왔다. 그는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10년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이 주는 노벨 평화 최고상 (The World Peace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
자선 활동가 및 기금 전문가로서 삶의 후반전을 보내고 있는 로베르토 바조 (출처 : http://goo.gl/jbehB)
또한 바조는 2002년부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UNFAO: United Nations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의 친선대사로도 활동하면서 농업 문제와 관련해 세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캠페인을 벌이고 기금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이제 팬들은 그라운드가 아닌 UN 회의에서 그를 더 자주 볼 수 있다! 바조의 페이스북 공식 팬 페이지에서 계속 그의 활동을 지켜보도록 하자.
발로텔리, 마음은 따뜻한 '돌+아이'
도대체 어떤 말로 그를 표현할 수 있을까? 연일 특이한 이슈로 기자들에게 좋은 기삿거리를 제공하는 “악마의 재능" 마리오 발로텔리. 팀 동료와 다투고, 벤치에서 아이패드를 가지고 놀다 감독과 다투고, 집에서 불꽃놀이를 하다 불을 내고, 훈련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유소년 선수들에게 다트를 던지는 등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르지만, 사실 그는 아주 순수하고 마음이 따뜻한 남자다.
나는 킥복싱을 배웠다” - 마리오 발로텔리, 만치니 감독이 발로텔리를 한 대 때리고 싶다고 말한 인터뷰를 듣고.
발로텔리는 어린 시절부터 인종차별에 시달려왔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이탈리아로 이민 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가 발로텔리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이탈리아 법원은 그를 이탈리아 부부에 강제 입양 시켜버렸다. 일곱 살에 유소년 축구팀에서 뛸 때에는 그의 팀 동료 부모들이 그를 팀에서 쫓아내라고 항명하기도 했고, 성인 무대에서는 홈 팀 팬들마저 그에게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동병상련이었을까? 그가 왕따를 당한 학생을 도운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어느 날 맨시티 훈련장에 찾아온 어린 학생에게 왜 학교를 가지 않는지 물어본 발로텔리는, 이 학생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학교로 직접 아이를 데려가 선생님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더 이상 왕따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줄 것을 요청하고는 유유히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라이벌 맨유의 수비수 퍼디난드에게 윙크를 날리는 발로텔리(왼쪽) (출처 : http://goo.gl/t6slX)
큰 화제가 되었던 ‘Why Always me?’ 자선 티셔츠를 영국 랩퍼와 공동 작업하여 출시한 발로텔리(右) (출처 : http://goo.gl/5cwbf)
발로텔리는 작년 10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더비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Why Always me?(왜 항상 나만 갖고 그래?)’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내보이며 세리머니를 펼쳐 큰 화제가 되었다. 그 문구가 계속해서 화제가 되는 것을 지켜 본 발로텔리는 영국의 Tincy Stryder라는 랩퍼와 합작하여 아예 자선 티셔츠를 출시해 버린다. 수익금 전액은 발로텔리가 지정하는 비영리단체에 기부 된다. 이 랩퍼는 티셔츠 출시 기념으로 발로텔리 송도 작업해서 내 놓았다. [발로텔리 송 바로가기]
분명 평범하지 않은 기행을 펼치고 있는 “멘탈 종결자" 발로텔리. 하지만 그의 자선 행보에 괜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왜 일까.
카누, 더 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노리던 한국 대표팀의 예선 마지막 상대는 아프리카 전통의 강호, 나이지리아였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한국은 바라마지 않던 16강 진출을 달성했다. 그리고 거기, 이번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나이지리아의 맏형 은완코 카누가 있었다.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부터 주목 받기 시작한 카누는 이후 챔피언스 리그 우승, 올림픽 금메달(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최초) 등의 숱한 기록을 낳으며 스타 플레이어로서의 커리어를 밟는 듯했다. 그러나 1996년 대동맥 심장 판막 질환이라는 마른 하늘에 벼락과도 같은 판정을 받게 된다. 미국에서 세 차례의 대수술을 받은 후 기적적으로 선수 생활에 복귀할 수 있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아스날, 웨스트브로미치, 포츠머스 등에서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다.
자신이 심장병 투병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심장병 투병 중인 아동들을 돕고 있는 카누 (출처 : http://goo.gl/puAgV)
심장병 투병의 경험은 카누가 2000년에 카누 심장 재단을 설립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심장병으로 투병하고 있지만 수술비와 제대로 된 의료 시설이 없어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돕고자 했다. 카누 심장 재단은 의료 센터들을 세운 후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추고 지금까지 400회가 넘는 심장 수술을 집도하였으며, 98.5%의 성공률을 기록 중이라고 한다. 최근 UNICEF 나이지리아의 홍보대사로 선정된 카누는 UNICEF가 후원하는 학교에서 유소년 축구를 지도하고 멘토링하는 일도 시작하며 자신의 사랑을 널리 실천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라운드에 남긴 족적만큼이나 간지나게 사회공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축구선수 공격수 편이었다.
이어질 #2미드필더 편과 #3수비수/골키퍼 편도 기대해주시라.
작성자 : ISQ 변영진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