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자인에 대하여 : Design Thinking & Social Innovation
2014. 2. 6. 0:35
새해가 밝은지도 한 달, 벌써 새해 다짐들이 흔적없이 사라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먹어 치웠던 음식과 당장 놀 시간이 아까워 미뤄뒀던 공부에 뒤늦게 괴로워 해본 경험, 누구나 한번 쯤은 있으실 텐데요. 이렇듯 합리적이어야 할 인간이 저지르는 비합리적인 선택들에 대하여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논한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의 말로 오늘의 포스트를 열어볼까 합니다.
“기존의 상황을 더 바람직한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일련의 행동을 고안해 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디자인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Everyone designs who devises courses of action aimed at changing existing situations into preferred ones).”
‘디자인은 옷이나 건축물 같은 것의 도안을 그리는 것 아닌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도 계실 것이고, ‘디자이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니터와 타블렛 앞에서 철야작업을 하는 사람 아닌가?’라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 저명한 인지과학자는, 어딘가 비합리적인 기존의 상황으로부터 이를 보다 합리적으로 바꿀 여지를 발굴하고, 더 합리적인 상황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행동들을 고안할 수 있다면, 당신 역시 또 한 명의 ‘디자이너’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작심삼일로 그치고 말았던 새해 다짐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행동사슬을 생각해내는 것도 디자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의 사회를 좀 더 살기 좋고 바람직한 세상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 역시 디자인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의 포스트에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또 하나의 방법론으로써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디자인(Design),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패러다임
디자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의류나 공업 제품, 건축물 등의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디자인에 대해 어떤 일원화된 정의가 존재한다기보다는, 여러 분야에서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각자 다양한 의미로 해석, 활용되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이라 볼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디자인(Design)은 본래 ‘지시하다, 표현하다, 성취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한 용어로, 특정한 목적 혹은 필요(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한 요소들의 재구성하는 일련의 활동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건축 및 가구 디자이너였던 찰스 임스(Charles Eames)가 이에 대해 “디자인이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로 요소들을 배치하는 방식을 계획하는 것(Design is a plan for arranging elements in such a way as best to accomplish a particular purpose).”이라고 언급한 바 있지요.
아마도 디자인 하면 가장 일반적으로 연상될 법한 이미지(?)
아직 보다 넓은 디자인의 개념이 와닿지 않는다면, 좁은 의미의 디자인에서 동일한 개념을 유추해보는 것 또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자인이 단순히 도면 위의 그림에 그칠 수 없는 이유는, 디자인 과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그 고유의 특성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디자이너 스티브 로저스(Steve Rogers)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은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다(Designing a product is designing a relationship).”라고 한 바 있는데요, 이에 따라 한 가구 디자이너가 의자를 디자인하는 상황을 가정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디자이너라면, 여러분의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요?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무게를 지탱할 지지대와 앉을 수 있는 받침대, 혹은 필요 여부에 따라 등받이까지 달린 일반적인 의자의 구조를 먼저 떠올려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는 등받이의 모양은 좀 더 널찍하고 깔끔하게, 지지대는 튼튼하고 굵은 원통형으로 등 디테일을 하나씩 더해가며 의자의 모양을 전체적으로 손보아 마침내 의자 디자인을 완성할 것이구요.
그렇지만, 디자인과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의 출발점은 위의 디자이너가 해결해야할 정확한 과제는 “의자를 디자인하는 것(design a chair)”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는, 의자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탱할 수 있는 방법을 창조(create a way to suspend a person)”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 Design Thinking... What is that?) 디자인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 역시 “진정한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이 어떻게 보이거나 어떻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것(Design is not just what it looks like and feels like. Design is how it works)”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아름다운 의자, 편안한 의자는 어떤 의자인가가 아니라, 사람이 앉아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디자인이 필요한가를 고민할 때, 비로소 진정한 디자인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우는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의자 'Spun'
이렇듯 디자인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라고도 볼 수 있는 디자인의 보편적인 개념과, 디자인의 진정한 본질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남긴 또다른 말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디자인’이란 ‘겉치레’를 의미하곤 한다. 인테리어 장식이나, 커튼과 소파의 질감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디자인이 아닌 것이 없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둘러싼 겹겹의 외형에 마침내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In most people's vocabularies, design means veneer. It's interior decorating. It's the fabric of the curtains and the sofa. But to me,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meaning of design. Design is the fundamental soul of a man-made creation that ends up expressing itself in successive outer layers of the product or service).”
물론 평범하게 생긴 의자에도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노력이 축적되어 있음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단순히 외형적인 측면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본질과 해결해야할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것이, 다음으로 소개할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디자인이 설계 도면 위의 선들에 한정되는 개념이 아님을 확인하셨다면, 이제는 이러한 디자인적 사고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는 어디에나 있다
앞서 확인한 디자인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잡스의 말처럼 세상 그 어떤 것도 디자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실제로 디자인 과정의 사고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인적 사고는 의료, 법, 정치, 비즈니스 등 어떤 분야에서든지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으며, 더 나은 결과를 창출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디자인적 사고는 문제 해결과 새로운 기회 발견을 위한 탁월한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분야별로 세부적인 테크닉과 툴은 달라지지만, 어느 분야에서 활용되든지 핵심은 동일하므로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적 사고에 대해 살펴보자면 이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 문제 정의(Define the problem)
단순하게 들리지만 디자인적 사고의 전단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단계로써,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defining the right problem to solve)”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으로 나아가 소비자가 쇼핑하는 과정을 체험해보거나 극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관찰하는 등 과정 자체에 참여하며 어린 아이처럼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정해진 사고의 틀을 깨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 전구를 바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디자이너가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서, “왜 불을 밝히는게 꼭 백열 전구여야 하죠?”라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2) 다양한 옵션 생성 및 고려(Create and consider many option)
문제가 정의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하나의 솔루션이 문제 해결에 있어 아무리 명백해보인다 할지라도, 다른 모든 솔루션을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데에 있어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필터에 의해 걸러진 채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포착되는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이며, 이를 위해서는 특히 다양한 관점의 중용과 팀 접근이 중요합니다.
3) 선택된 제안들의 정제(Refine selected directions)
앞선 단계에서 고려된 숱한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들 간에는 다양한 통합과 분해가 반복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몇 가지 선택 가능한 대안들이 서서히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3.5) 반복(Repeat)
처음 규정한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2~3단계를 반복합니다.
4) 최종 대안의 선택과 실행(Pick the winner, excute)
위의 단계를 모두 거쳤다면 최종 단계에서는 각종 아이디어 간의 경쟁에서 살아 남은, 문제 해결을 위한 최적의 대안을 찾거나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최종적으로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다면, 이에 대한 실질적인 검증 또한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겠지요.
이와 같이 살펴본 디자인적 사고가 협소한 의미의 ‘디자인’ 뿐만이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지 활용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맨 처음 언급되었던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에 의해 이미 논의된 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경제학, 심리학, 인지과학, 인공지능 등을 연구한 허버트 사이먼은 1969년 출판된 그의 저서 “Sciences of the Artificial(인공과학)”에서 디자인을 “기존의 상황에서 보다 바람직한 상황으로의 전환”이라는 넓은 의미로 정의하였습니다. (다만 허버트 사이먼은 디자인적 사고를 Define, Research, Ideate, Prototype, Choose, Implement, Learn의 7단계로 정의했으나, 사고구조의 본질에 있어서는 위에서 짚어본 내용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비추어본다면 디자인적 사고란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해 섣부른 판단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실패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쌓아올려 가며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디자인적 사고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어떤 상황에서든지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디자인적 사고에 관한 내용은 Fast Company의 Design Thinking… What is that? 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자인
기존의 상황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으로의 전환이 디자인의 정의라는 점을 보다 넓게 해석한다면,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상태보다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디자인적 사고가 소기의 목적 혹은 필요를 최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여 문제 해결 이전보다 더 나은 상황을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인 도구로써의 디자인적 사고의 장점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디자인을 실제 사회적 문제 해결을 통한 혁신에 활용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면 어떨까요?
오늘날의 세상에 수많은 사회 문제가 존재하는 만큼, 그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주체의 다양한 노력들이 산재해 있음은 이미 낯설지 않은 사실일 것입니다. 정부와 NGO는 물론 기업에서도 CSR 혹은 CSV를 주창하며 혁신에 나서고 있고, 천문학적 숫자의 재산을 기부하는 금융 자본가에서부터 결연 후원을 실천하는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보다 나은 모습으로 바꾸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노력들을 통합해 시너지를 내고자 하는 ‘Collective Impact’와 같은 협력에 대한 논의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구요.
그렇지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다양한 한편, 그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기 위한 보다 효과적인 방법론에 대한 공급은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긴밀한 협력을 방해하는 섹터 간의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현실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을만한 메커니즘 또한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디자인이 오늘날의 사회를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어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위치합니다. 미국의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전략가인 셰릴 헬러(Cheryl Heller)는 이러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창의적인 과정을 통해 다양한 팀을 이끌 수 있으며, 다양한 요소들을 단순화시키고 연결, 통합함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거나 스토리를 띨 수 있게 하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보다 아름다운 방식으로 솔루션을 구축할 수 있게 한다. (…) 요컨대 디자인은 사회 혁신에 있어 완전히 판을 바꾸어놓을 만한 기여(game-changing contribution)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을 위한 디자인은 모든 것에 대한 디자인을 포함한다. 의사소통에서부터 커뮤니케이션 캠페인, 경험, 구조, 기술 플랫폼, 시스템, 제품, 비즈니스 모델, 전략, 예술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사회혁신을 위한 디자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제품, 인터랙티브 매체, 브랜드 아이덴티티, 게임 등 전통적인 것은 물론 새로운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디자인 지식이나 매체가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변화를 위해 필요로 하는,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통합을 이루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Social Innovation Needs Design and Design Needs Social Innovation)
앞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디자인적 사고가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디자인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일 것입니다. 셰릴의 말처럼, 디자인은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통합하여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창의적인 과정으로써, 지금의 사회 혁신을 위한 노력들이 처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혁신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 자체에 대한 보다 성숙한 이해와 이를 둘러싼 협력 현장을 다룰 수 있는 충분한 기술과 노하우가 부재한다면 디자인적 사고 또한 단순한 탁상공론에 불과하겠지만, 이러한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질 수 있다면 디자인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던 것을 가시화시켜주고, 그를 통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셰릴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디자인
이와 같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서의 디자인의 잠재력을 일찍이 확인한 사람들에 의해, 디자인은 이미 세상을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어나가는 역할에 있어 자신의 입지를 서서히 넓혀오고 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디자인과 사회의 연관관계가 그리 새로운 논의라고도 할 수 없을만큼, 오랜 옛날부터 디자인은 사람과 세상을 위해 활용되어 왔습니다. 예컨대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보다 수월한 방법에 대한 오랜 고민에 대한 디자인적 사고는, 미끌림마찰을 굴림마찰로 전환하는 물리학적 매개체라는 솔루션, 이른바 ‘바퀴’로 결실을 맺은 바 있지요. 뿐만 아니라 세기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부터 알버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의 사고방식에서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디자인적 사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 언급한 허버트 사이먼도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최근 들어 디자인적 사고의 적용 자체가 하나의 학문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 또한 중요한 움직임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방송통신대학교라 볼 수 있는 ‘The Open University’는 디자인적 사고를 학문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디자인적 사고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바로 스탠포드대학교의 디자인 스쿨(Stanford University’s Institute of Design) 대학원 과정 중 하나인 ‘Design for Extreme Affordability’가 있습니다.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팀이 되어 디자인을 통해 세계 빈곤층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이 수업에서는, 디자인적 사고가 사회 혁신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실험이 그야말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개강 이후 지금까지 약 10여년 동안 14개 국가에서 80여 개에 이르는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인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임팩트를 실험하고 있는 이 코스가 낳은 유수의 프로젝트 중 잘 알려진 사례가 바로 제3세계의 빈곤가정에서 저체온증으로 인한 영유아의 사망률을 줄이기 위한 혁신적인 저가형 인큐베이터를 개발한 ‘Embrace’ 팀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진 통 안에 산소를 주입하며 적정한 온도를 맞추는 필터로 이루어진 기존의 인큐베이터를 어떻게 손봐야 보다 더 저렴하고 편리한 디자인의 인큐베이터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한 여타 인큐베이터 회사들의 노력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반면, “아이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한 Embrace팀의 발상이 파격적인 혁신을 이루는 디자인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생명을 품는 기술과 자본의 만남 : GE와 Embrace의 파트너십 살펴보기 참고)
기존제품 가격의 1%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동일한 효과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가공할 만한 경쟁력과 더불어 영유아 사망률을 극적으로 감소시키는 임팩트를 동시에 갖추었던 Embrace 프로젝트가 제품 디자인의 혁신을 보여주었다면, 서비스 디자인의 혁신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인도의 아라빈드 안과병원(Aravind Eye Care System) 역시 디자인적 사고가 가져다주는 위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가난한 환자들이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실명이 되어버리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진료 서비스의 가격을 낮출 수 없었던 상황을,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 극복한 것입니다. 아라빈드는 수술에 사용되는 렌즈나 기구의 가격을 낮추는 것에 대한 고민이 아닌, 보다 짧은 시간 내에 보다 효율적으로 수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 자체에 대한 고민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적 사고는 여러 침대를 병렬 배치하고 한꺼번에 다수의 의사들이 분업화하여 각자 특화된 작업에만 시술하는 공장식 수술진료로 수술 원가를 극적으로 낮추는 결실로 이어졌지요. 아라빈드가 이를 통해 안과 수술을 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빈곤층의 실명을 방지하였을 뿐 아니라, 의사 1인당 연간 시술 환자 수가 일반 병원의 다섯배에 달하는 효율성은 물론 세계 최대의 영리 안과병원이라는 성과를 달성하였다는 사실도, 디자인적 사고의 위력을 아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라빈드 안과병원의 진료 현장
“이런 것도 디자인이라니, 그렇다면 세상에 디자인할 수 없는 게 없겠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렇습니다. 지금의 세계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최적의 세계가 아닌 이상,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요소들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이와 같이 살펴본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디자인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21세기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불리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전문기업 IDEO의 CEO인 팀 브라운(Tim Brown)이 Harvard Business Review에 기고한 “Design Thinking”의 내용으로 마무리지어볼까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혁신을 통해서 개선될 수 있는 요소는 어디에나 산재해 있다. 그리고 이 문제점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은 언제나 인간이다. 최선의 아이디어와 궁극적인 솔루션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적(human-centered)이고, 창조적(creative)이며, 반복적(iterative)이고 실용적인(practical) 접근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출처 : Design Thinking)
함께 보시면 좋을, Tim Brown의 TED 강연 "Designers, Think BIG"
※ 이 외에도 Design Thinking에 관한 Tim Brown의 TED 강연을 더 듣고싶은 분들께서는 Youtube Playlist에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Can Design Save The World?
포스트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디자인에 대한 일반적이고 좁은 의미의 개념과 이번 포스트에서 다룬 넓은 의미의 개념에 대한 분류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이번 포스트에서는 디자인적 사고의 포괄적인 적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셈이지만,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라 받아들여지는 영역 내부에서도 소셜 디자인(Social Design)이나 필란트로픽 디자인(Philanthropic Design)에 대한 논의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특히 이제는 거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역시 장애 유무나 연령 등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더 나은 세상,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점점 확산되어가는 이른바 굿디자인(Good Design) 문화의 대표주자로써 “인간을 위한 디자인(원제 : Design for a real world)”이라는 저서 등을 통해 사회와 환경에 책임을 지는 디자인을 주장하고, 라디오를 살 돈 조차 없는 발리의 원주민들이 화산 폭발 예고를 미리 듣고 대비할 수 있도록 깡통 쓰레기로 만든 원가 9센트짜리 ‘깡통 라디오’로도 유명했던 디자인계의 거장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이라든지, 소비자를 현혹시켜 사회문제를 조장하는 디자인이 아닌 사회에 도움이 되는 디자인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디자이너를 위한 디자인 혁명(원제 : Do Good Design)” 등의 저서를 쓴 그래픽 디자이너 데이비드 B. 버먼(David Berman) 등의 인물들도, 여느 산업 및 직업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디자이너들 역시 스스로의 사회적 책임(Designer’s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한 의식을 자체적으로 키워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렇듯 좁은 의미에서든, 넓은 의미에서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있어서의 디자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며, 앞으로도 접목 가능한 분야가 더 다양해질 가능성과 더불어 융합이라는 시대적 트렌드 등을 감안한다면 그 위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디자인을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만능 도구로 여긴다면 그것 또한 (당연하게도) 문제일 것입니다. “데이터 시각화(Data Visualization)”의 선구자이자 “정보 디자인(Information Design)”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터프트(Edward R. Tufte) 예일대 교수는 “디자인이 잘못된 컨텐츠 자체를 구제할 수는 없다(Design cannot rescue failed content).”는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기존의 요소들을 목적 달성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애시당초 요소 자체가 잘못된 경우 디자인이 그를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니, 잘못된 요소를 올바른 것 마냥 감쪽같이 속여내는 디자인이라면 오히려 그 디자인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누구나 디자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 출신 디자인 운동의 대가 마시모 비그넬리(Massimo Vignelli)는 “디자이너의 인생은 추한 것과의 전쟁이다(The life of a designer is a life of fight: fight against the ugliness).”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the ugliness’가 외형적인 의미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비그넬리가 이끄는 디자인 운동의 사상이 ‘디자인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며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보다 나은 질로 끌어올리는 것이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말한 진정한 ‘the ugliness’는 어딘가 문제를 품은, 그래서 개선의 여지가 있는 모든 부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한편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테렌스 콘란 경(Sir Terence Conran)은 “디자이너가 해야할 일은 세계를 두고 지금 그것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다(The designer’s job is to imagine the world not how it is, but how it should be).”라는 멋진 말을 남긴 바가 있지요.
이들의 말을 빌려본다면, ‘디자인’이란 세상 여기저기에 여전히 산재한 문제점들을 개선해가는 끊임없고 치열한 노력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문제 투성이인 지금의 상태로부터 누구나 정당하고 옳다고 여길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나가는 노력이라고도 넓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간단함(Simplicity)이 미학인 디자인을 논하는 글이 장문이 되어버린 것은 아이러니지만, 결국 이 긴 포스트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바로 디자인이란 본질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포스트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면, 우리의 일상 속의 사소한 비합리적인 상황을 개선하는 것도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대답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세상을 디자인하는 또 한 사람의 디자이너이자, 자신의 인생을 디자인하는 유일무이한 디자이너로써, 이제 다시 한번 그 디자인들을 제대로 고민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디선가 보았던 말처럼 인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가장 흥미로운 디자인 프로젝트이고,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바꾸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 글은 다음의 아티클들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Fastcompany : Design Thinking… What is that?
SSIR : Social Innovation Needs Design and Design Needs Social Innovation
Harvard Business Review : Design Thnking by Tim Brown
작성자 : ISQ 백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