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임팩트를 만들어낼수 있을까? : 21세기 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묻기

2013. 7. 31. 13:16

예술의 가치창출에 대하여

예술, 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우리는 흔히 어떤 것을 떠올릴까요? 곧바로 생각나는 것은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회나 유명한 미술 작품과 같이 예술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전통적이고 직접적인 이미지들일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움, 고귀함, 심오함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일 수도 있겠지요. 인류가 문명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 우리 곁에 머무르며 생존의 차원인 의식주를 넘어 삶의 차원인 "잉여"가치를 담는 기능을 담당해왔던 예술은 역사의 발전과정과 함께 그 외연이 확장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하위 장르를 거느리고 또 이를 바라보고 정의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생겨난 예술.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이제 사회 속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어떤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예술 참여자 혹은 수용자의 답을 듣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도 했구요. (이렇게 예술의 역할과 범위에 대해 흥미로운 최근의 탐구 사례를 하나 소개해볼까요.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인 권위의 미술 행사인 카셀 도쿠멘타, 작년에 열린 13회 행사에는 한국의 젊은 작가 문경원, 전준호의 "뉴스 프롬 노웨어"라는 프로젝트가 초대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이 맡는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대 예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여러 관점에서 성찰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건축, 디자인,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영상물을 비롯한 다양한 오브제를 제작하고 또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협업 프로젝트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의 역할과 가치는 어떠했을까요. 중세시대부터 꽤 오랜기간 동안 예술은 누군가가 소유하고, 누군가가 지원하고, 누군가가 만들지만,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수 있었던, 혹은 그들의 소유로 남았던 대상이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예술을 이끌어나갔던 주요 동력은 종교단체에서 나왔고,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교황 Julius II 등이 유명한 후원자의 역할을 맡아왔지요. 그런데 이들의 후원을 통해 모두가 접할 수 있는 공공예술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입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시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수 있도록 분수를 만들었고 바르토로메오 아마나티(Bartolomeo Ammannati)등의 예술가들을 등용해 도시 곳곳에 시민들이 즐길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들의 유산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피렌체나 로마 골목 골목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분수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공공 예술 후원 활동에서 정치적인 목적을 배제할수는 없지만, 이러한 예술품들을 통해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증진 되고 도시의 가치가 올라갔다는 점은 당대의 예술이 가졌던 사회적인 역할을 보여줍니다.

한편 유명한 후원자들을 통해 예술이 본격적으로 꽃피우게 된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도 부유한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는 꾸준히 지속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파리의 자크마르트 앙드레 박물관 (Musee Jacquemart-Andre)나 뉴욕의 프릭 콜렉션 (Frick Collection)을 들 수 있는데요. 이 공간들은 현재 모두가 경험할수 있는 박물관이되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원래 개인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부유한 콜렉터들은 수준높은 예술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즐길수 있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자크마르트 앙드레 박물관 (사진출처: http://www.musee-jacquemart-andre.com/fr/home)

프릭 콜렉션 (사진출처: http://www.frick.org/collection)

물론 그 이후로 예술의 범위와 예술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대상의 폭은 빠르게, 또 크게 변화했습니다. 윗 사진에 나온 Frick 콜렉션의 소유자였던 헨리 클레이 프릭 (Henry Clay Frick)이 생을 마감한건 1919년, 그리고 Frick Collection 이 대중에게 공개된것은 1936년인데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세기 중반 급부상한 새로운 예술 사조가 오늘날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팝아트(Pop Art)입니다. 팝아트는 1950년대에 널리 퍼지게 된 예술운동으로, 대표적인 예술가들로 우리가 잘 아는 앤디 워홀 (Andy Warhol), 로이 리히텐스타인 (Roy Lichtenstein) 외에도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센버그, 짐 다인, 클라스 올덴버그, 그리고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있습니다. 팝아트와 함께 등장한 추상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사조 이후 예술은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대중적인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물감을 뿌리고, 한가지 색으로 캔버스를 덮고, 실버 스크린으로 프린트하는 제작 방법, 또 대중 문화의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는 예술의 대상은 이전 시대의 예술이 특징으로 갖던 전문성에서 크게 벗어난 변화인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점은 이 Post-War(세계 2차 전쟁후)라고 불리는 이 시대 작품들이 오히려 미술품 경매장에서는 최고가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인 옥션하우스에서 Christie’s 에서 일했던 당시 Christie’s는 워홀의 작품을 대거 인수받기도 하였는데요, 이는 고가의 예술품에 대한 일종의 투자인 것이지요. Post-War 작품들은 한번 경매 판매할때 495백만 달러를 (약 5천억원) 올리기도 합니다. 즉, 이전과는 달리 예술을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은 더 다양화되고 비용이 적어졌음에도, 예술의 소유 측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구매력과 자본을 갖춘 소수가 지배하는 예술시장의 구조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소유로 지탱되는 예술, 그런 예술에 여러가지 회의가 들곤합니다. 그런 회의감을 세가지 질문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 예술을 앞으로 누가 만들것이며, 예술을 통해 얻는 수익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요? 

  •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가 소유하는것일까요?

  • 예술은 누가 만드는것이며, 예술의 가치만큼 그들이 돌려받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에 온전한 답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예술이 어떻게 새롭게 공유될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이번 포스트를 통해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Q1. 예술을 앞으로 누가 만들것이며, 예술을 통해 얻는 수익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요?

우리 삶속의 예술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후, 미국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즈의 경제활동은 이전에 비해 많이 뒤쳐졌습니다. 뉴올리언즈 재즈와 전통 재단은 (New Orleans Jazz and Heritage Foundation) 미래의 재즈 예술가들을 길러내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장학금, 수업제공등의 방법으로 지역의 예술경제를 가꾸는데에 바로 그 원동력인 재즈음악을 사용한 것입니다. 매년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의 수익은 루이지애나 남부의 문화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과 페스티발에 오는 관객들이 모여 카트리나 수해 지역 집짓기 캠페인을 실행하는 자리 또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해비타트 활동을 바로 지역의 재건을 위해 예술활동의 이름하에 실행한 것입니다. 예술의 가치는 이렇게 지역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까지 완벽하게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자연 재해의 피해를 극복하기위해 그 지역의 특성인 예술의 힘을 빌리는것. 지역적인 전통을 이어갈수 있는 해결책들을 더 많이 볼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뉴올리언즈 재즈와 전통 재단 (http://www.jazzandheritage.org/)

새로운 아티스트를 양성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세계 어디서나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은 예술교육을 받으면 다양한 경험을 위해 새로운 곳이나 이미 친숙한 곳의 레지던시(Residency: 단체나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 예술가가 작품활동을 하도록 커미션 하는것)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그후 독립적으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꾸려나가게 됩니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레지던시가 있는데요. 뉴욕에서는 좀 특별한 레시덴시를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뉴욕은 이상한 동네입니다. 작지만 크고, 개인주의적이지만 커뮤니티적이고, 최첨단인듯 하지만 낡고 오래된 곳이기도 한데요. 이런 뉴욕의 커뮤니티는 어디에서 형성될까요? 한국에서 흔히 볼수 있는 광경, 동네 슈퍼 앞에 아저씨들,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듯이 뉴욕에서도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곳이 몇군데 있습니다. 바로 이발소와 빨래터입니다. 할렘의 길을 오후나 저녁에 걸어다니면 할아버지가 큰 노래 소리를 내는 올드스쿨 라디오를 차에 얹어놓고 모두들 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곳들. 젋은 청년들도 머리를 매만지러, 동네 젊은 아가씨들도, 할머니들도 빨래하러 오는곳. 바로 이 장소가 오늘의 두번째 주인공입니다.

빨래방 프로젝트 (http://www.laundromatproject.org/)

빨래방 프로젝트 (The Laundromat Project) 라고 불리는 이 아트 교육 기관은 실제로 동네 빨래방을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제 대학 기숙사에서 걸어서 10분거리인 할렘의 116번가와 레녹스 애버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총 세 개의 빨래방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매 여름마다 관심있는 동네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참여할수 있는 아트 워크샵을 진행하며  여러가지 교육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동네 빨래도 다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가족 사진을 찍는 행사, 동전 지갑을(동전으로 빨래를 하는 빨래방에서는 필수품입니다) 만드는 워크샵에서부터 실크 스크린 프린트 하는 법까지 배울수 있는 다양한 워크샵이 매주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레시던시는 직접적으로 동네에 기여 할수 있는 공공예술을 만들도록 지역의 아티스트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완벽한 환경은 아닙니다. 누가 보면 굉장히 열약한 환경에서 고생한다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모이는 곳에서만 일어날수 있는 현상들. 어쩌면 미래에는 동네 빨래방에서 길러진 예술 인재들이 나타날지 기대해볼수 있지 않을까요?

 

Q2. 예술은 누가 만드는것이며, 예술의 가치만큼 그들이 돌려받고 있을까요?

예술가: 하나의 커뮤니티속 사람들

얼마전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회고전을 가진 엘 아나츠이(El Anatsui). 회고전이 끝나도 뉴욕의 메트 (Met, Metropolitan Museum의 줄인말) 이나 모마 (MoMA)에서 쉽게 볼수 있는 아티스트입니다. 2004년 광주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작가인데요. 가나인이지만 나이지리아에서 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엘 아나츠이의 작품 Earth’s Skin, 2007. (사진 출처: http://www.brooklynmuseum.org/exhibitions/el_anatsui/#)

메트(Met) 에서 처음 그의 작품을 보았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가 자기가 메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메트의 끝없는 미로속을 이리저리 헤메다가 드디어 금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는 그의 작품을 본것입니다. 직조의 형태는 세계 어느곳에서도 볼수있는 형태의 전통적인 패브릭입니다. 하지만 단단하고도 물결치는듯한 그의 패브릭은 뭔가 다른 빛을 띄고 있습니다. 패브릭 고유의 균일한 패턴, 하지만 그속에서 요동치는듯한 움직임. 그 모든것을 더 자세히 보면 그의 작품이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침 내가 재활용 통에 던져버린 수많은 병 뚜껑들로 이루어져 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을 만드는것은 한사람의 힘으로는 이뤄질수 없는 일입니다. 먼저 수많은 병뚜껑을 수집하고, 수카(Nsukka)라는 지역의 나이지리아 많은 청년들의 수고가 쌓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청년실업의 문제는 한국의 청년만이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이지리아에서도 꿈많고 감각있는 청년들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을 떠날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네요. 그때 아나츠이는 자신의 지역으로 예술이란 이름 아래 일거리를 들고 왔습니다. 여럿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병뚜껑을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펼쳐보기도 하며 결국은 수많은 세계적인 박물관들에서 그들의 노고가 벽에 자랑스럽게 걸리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데요. 그리고 병뚜껑이라는 아이러니한 재료 또한 그 매력을 더합니다. 아나츠이의 작품은 제국주의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나츠이는 그 역사적 이야기 또한 아름답게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태, 그리고 잘 이해할수 있는 재료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생산과정 뒤에는 바로 그 지역의 활력을 살릴수 있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전시중인 런던 테이트 모던 박물관 (사진 출처: http://www.tate.org.uk/)

기대로 가득 찬 사람들이 런던의 테이트 모던 박물관 (Tate Modern) 으로 들어옵니다. 텅 비어있는 갤러리의 벽들, 뭔가 이상하지만 현대 예술이란 항상 우리에게 이런 기대감과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제시하곤 합니다. 몇걸음 더 들어오니 발 밑에 무언가가 바스락 거리며 밟힙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수많은 해바라기 씨들이 서로에게 작은 몸을 부대끼며 움직입니다. 그 수를 헤아려보려 고개를 들어보니 온통 해바라기 씨로 덮이지 않은 공간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알려져있는 중국인 아티스트인 아이웨이웨이 (Ai Weiwei) 의 해바라기 씨 작품입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를 했지만 그 이후에는 세계 곳곳에서 전시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수백만개의 해바라기씨들은 사실 진짜 해바라기 씨가 아닙니다. 다 하나하나 도자기로 구워진 후 손으로 칠해서 만든 알갱이들입니다. 다 어디서 온걸까요? 그 원산지가 궁금할때 옷이였다면 라벨을 들춰보겠죠, 음식이였다면 포장지 뒤의 자세한 원료를 볼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에도 열번 이상 알게 모르게 이 세 글자를 읽습니다: “Made in China.” 오늘 우리는 박물관에서 또 다시 중국 제조업의 일화를, 그것도 발 밑에서 경험합니다. 그리고 수백명의 중국 징더전의 주민들이 해바라기 씨를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칠까요? 아니면 그저 해바라기 씨를 보며 경이로움을 느낄까요? 우리 삶에서는 어떤가요? 우리가 평소에 쉽게 소모하며 사는것들, 어쩌면 밟고 다니는것들은 다 어디에서 누군가가 만들어내는것이라는 생각해볼 시간이 있을까요? 이렇게 예술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 마을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지역 경제의 임팩트를 창출하는 예술. 현대 예술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곳곳의 커뮤니티에서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전시중인 런던 테이트 모던 박물관 (사진 출처: http://www.tate.org.uk/)

Q3.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가 소유하는것일까요?

공공 예술 / Public Art: 아무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소유하는 예술

최근 뉴욕의 구겐하임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우리가 항상 보는 직사각형의 공간을 빛의 공간으로 바꾸기도 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형의 구겐하임 박물관의 우윳빛 실내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보여주면서 아름다움의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었습니다. 결코 한명의 후원자가 소유할수 없는 그런 예술의 가치는 가격으로 따질수는 없지만 모두가 공유할수 있는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구겐하임 박물관 (Guggenheim Museum) New York, NY (사진 출처: artforum.com)

라이스 대학의 공공예술 작품: Twilight Epiphany by James Turrell (사진 출처: http://skyspace.rice.edu/)

위의 사진은 텍사스에 있는 라이스 대학 (Rice University) 캠퍼스에 자리잡은 공공예술 작품인 Twilight Epiphany 입니다. 기하학적 건축물에 빛을 사용해 만든 작품으로 우리가 항상 볼수있는 하늘 그 자체를 예술작품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밑의 사진처럼 평소에도 볼수 있는 것을 새로운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것. 그 지역에 살거나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할수 있다는것. 그런점들이 공공예술 (Public Art)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아닐까요.

라이스 대학의 공공예술 작품: Twilight Epiphany by James Turrell (사진 출처: http://skyspace.rice.edu/)

 샌프란시스코 작가인 배리 맥기의 작품 (사진 출처: sfmoma.org)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 모마 (SFMOMA)에 들어섰던 적이 있습니다. 휘청이듯 이상하게 앞으로 휘어있던 벽에 수많은 액자가 그 벽을 감싸듯이 걸려있습니다. 또 밝은 색상과 패턴, 그리고 무심하게 쓱쓱 그린듯한 그래피티와 낙서들이 당당히 액자에 걸려있었지요. 이렇게 예술의 장소가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떠나 길거리로, 그리고 길거리에서 다시 갤러리로 돌아오는 현상은 여러 아티스트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곳에서도 이제는 그래피티 형태의 예술을 볼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소개하고 싶은 스트리트 아티스트는 배리 맥기 (Barry McGee) 입니다.

샌프란스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젊은 아티스트는 원래 스트리트에서 활동하던 아티스트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이제 공간과 관객을 가리지 않고 서핑보드에서도, 길바닥, 벽돌벽, 그리고 박물관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원래는 합법화되지 않은 그래피티라는 형태의 예술은 이제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형상화 하기라도 하려는듯, 항상 완벽한 모습의 박물관의 벽조차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렁이며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려고 하는듯이 보입니다. 예술은 그렇게 박물관을 탈출해 길로 나섰고 길의 예술은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피티야말로 공공예술의 대중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시 구석구석 출몰하는 태깅 (Tagging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서명과 같은 그래피티의 형태), 그들의 수신호를 찾아가는 재미는 한국에서도 느낄수 있습니다. 

파크 애버뉴 아모리 박람회 (사진 출처: http://armoryonpark.org/)

그 다음으로 볼 아티스트는 앤 해밀턴 Ann Hamilton 입니다. 제가 2011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도가도비상도”에서 직접 만나볼 기회가 있었던 아티스트입니다. 그 이후 파크 애버뉴 의 아모리 (Park Avenue Armory) 박람회에서 해밀턴의 작품을 또 만나볼수 있었는데요.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창조하는 아티스트로서 더 훌륭한 예가 없다고 생각해서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파크 애버뉴 아모리 에서 선보인 “The event of a thread” 작품입니다.

비디오를 보시면 이 작품의 원리를 어느정도는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그네를 타는 사람들, 그리고 펄럭이는 천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슨 종이 봉투 꾸러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 예술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네를 타는 사람들 때문에 가운데의 천이 펄럭이고, 아무도 그 아래에 누우라고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러고싶었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는 사람들. 이 모든것들이 가능한것은 대중이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네를 타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면 천이 펄럭이지 않았을것이고, 그랬다면 그 아래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사람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것이지요. 제가 이 박람회를 갔다 온지 며칠 후 수업에서 어떤 다른 학생과 이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아들과 박람회를 갔다 왔다고 말했는데요, 그 아이는 자폐성이 있었지만 곧 사람들의 사회적인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것을 알아채고 그네를 타고 싶어했고, 자신은 아들의 그네를 한참동안 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잠깐이라도 소통하는 느낌을 뉴욕에서, 그것도 부유한 파크 애버뉴에서 받은건 처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가 소유하는것일까요? 

이렇게 현대예술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에게 다가오고, 다양한 커뮤니티에 새로운 원동력이 되기도하며 우리 사회가 공유할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현대예술 작가들과 예술기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가지 외국의 사례들을 살펴보았지만 국내에서도 이와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술이 만들수 있는 임팩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예술의 변화를 기대해 봅니다. 


작성자 : ISQ 왕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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