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여: 한국사회투자 이종수 대표
2013. 5. 7. 16:05
본 글은 Impact Business Review 5-6월호에 실린 [PEOPLE 흐르는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여: 한국사회투자 이종수 대표] 인터뷰 기사를 IBR 편집부 동의 하에 실은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Prologue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올해 자리를 잡은 한국사회투자 이종수 대표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액자에 크게 걸린 저 네 글자였다. 신영복 선생의 친필로 새겨진 상선약수의 뜻을 늘 마음속에 새기고자 한다는 이종수 대표. 대학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한 후, 외국계 기업은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들어가게 된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국을 거치며 금융 커리어를 꾸준히 쌓은 그는 세계 최대의 보험중개사 에이온 코리아 사장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금융인으로서 탄탄하고 화려해 보이는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겠다며 돌연 사회연대은행 설립을 결심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서울시 사회투자기금을 운용 수행하는 한국사회투자의 대표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금융’이라는 꿈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장애물을 만나면 싸우지 않고 먼 길이라도 돌아서 흘러간다. 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본연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이를 닮기 위해서는 늘 낮은 곳을 향하고 고이지 않고 흐르는, 변함없는 쇄신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따라서 물을 닮는 일은 편하고 안정적인 길을 쫓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금융을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물처럼 그간 쉬지 않고 흐르고 또 흘렀던, 한국사회투자 이종수 대표를 만났다.
정통 ‘금융맨’이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으로 눈을 돌리기까지
인터뷰 약속을 잡고 보니 우연하게도 사회연대은행 설립 1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에 이렇게 뵙게 되었네요.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먼저 여쭙겠습니다. 현재는 사회연대은행을 잠시 떠나 재단법인 한국사회투자를 이끌어나가고 계시지만, 대표님과 사회연대은행을 서로 떨어뜨려 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회연대은행이 첫 문을 열었던 2003년 당시만 해도 사회적 금융(social finance)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이지 않았는데요, 어떻게 이 분야로 입문하시게 된 것인지 결정적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하겠네요. 사회연대은행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호주, 홍콩,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정통 ‘금융맨’으로 살아왔습니다. 1996년 당시 저는 일하고 있던 은행에서 정치적으로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던 캄보디아에 은행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요. 캄보디아에 막상 가 보니 체계라는 것은 전혀 잡혀 있지 않았고, 사회는 편법을 기준으로 돌아가고 정치인들은 권력 의지에만 혈안이 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했어요. 그 현장을 목격하고 언젠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던 수감 시절의 결심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어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밤낮없는 고민이 시작된 거죠. 그러던 중에 개발도상국 소득증대 프로젝트라는 사업을 하고 있던 아시아개발은행의 관계자를 만나 ‘농촌 크레딧(rural credit)’ 사업을 시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코넛을 아이템으로 선정했는데, 네트를 만들 수 있는 틀과 코코넛 열매를 제공하면 농민들이 제품을 만들고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모델을 짜는 것, 이게 제가 처음 기획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이었어요. 정부의 지원과 아시아개발은행의 재정 지원으로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전으로 코코넛 프로젝트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사업을 실행으로까지 옮기지는 못했지만, 이 일을 맡았던 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을 전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프놈펜 시내와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부끄러움과 죄스러운 마음이 밀려오는 거에요. 누군가는 전쟁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저렇게 절박한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질문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길을 걸으며 살아온 제 발자취를 초라하게 만들더라고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할 당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스무 살 청년의 뜨거운 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했던 맹세가 생각났어요. 그 맹세 앞에서 나는 떳떳한지 혹은 주변의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나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건 아닌지 질문 앞에서 무력해지는 자신을 느꼈습니다. 이 허무함 덕분에 나 혼자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소외된 이들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오래전의 다짐을 기억할 수 있었죠.
캄보디아에서의 깨달음이 한국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통한 사회적 금융 도입으로 이어지기까지 사이의 기간 동안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라는 반성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과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기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하기 때문인데요.
열심히 달려오던 마라톤을 잠시 멈추고 어디로 갈지 고민만 하던 시절이 뒤따랐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1년 쯤 시간이 지났을 때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들을 대상으로 직업 훈련을 시키는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수석컨설턴트 자리를 인도네시아 노동부로부터 제안 받았죠. 캄보디아에서 무산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대한 아쉬움을 가슴속에 항상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은 사업 역시 농촌 빈민 대상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어요. 3년 동안의 교육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것이 제 역할이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통해 배운 점도 많았고 한계도 역시 느꼈습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업 훈련만 시켜서는 안 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자금 지원까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산의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죠. 인도네시아에서의 경험은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이 가진 잠재력에 확신을 얻는 것과 더불어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성공 시키려면 어떤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하겠구나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외국에서 시도했던 마이크로크레딧을 한국에서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거죠.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은 개발도상국처럼 노동력이 풍부하고 경제활동이 고도화되지 않은 지역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한국에서의 마이크로크레딧 사업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중 자영업자 비율은 약 30% 이상으로 매우 높습니다. 그만큼 경쟁이 심하죠. 또 자영업을 했을 때 5년 이내에 망할 확률이 80%가 넘어요. 그런 사람들한테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는 것은 매우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영업자 비율 외에도 대부분 사람들이 도시에 거주한다는 점 역시 걸림돌입니다. 유동인구가 많으면 그라민은행이 회원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묶어서 마을 공동체가 회원들의 신용을 보증할 수 있도록 만든 모델이 적용 불가능하죠. 우리나라에서는 신용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기에 무담보 무보증으로 소외 계층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 자체가 설득하기 어려웠어요.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딧에 대한 고민과 솔루션
(사무실에 놓여있는 유누스 박사와 함께한 사진을 가리키며) 마이크로크레딧 전도사라 할 수 있는 유누스 박사를 실제로 만나신 것은 언제인가요.
한국에서 어떤 마이크로크레딧 모델이 가능할까 고민하던 그 시기에, 직접 사례를 찾아보기 위해 방글라데시 다카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어요. 은행 한 개 지점이 15~20개 촌락을 맡으면서 다섯 명이 모여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면 대출 자격이 주어졌는데 한 달 동안 대출 심사를 하더라고요. 지금은 다섯 명이 열 명으로 늘었는데 그룹의 회장과 서기를 선출해 매주 회의를 갖고 회장들은 중앙의 그라민 센터에 모여 따로 주간 회의를 해요. 한 달 동안 이런 준비 과정을 거치면 그룹 중 두 명이 융자를 받을 수 있죠. 이 첫 번째 대출자들의 대출금 상환 성적에 따라 그 다음 지원자들의 대출 여부를 은행이 결정해요. 만약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룹이 연대책임을 져야 하더라고요. 외부 지원금, 기부금으로 시작한 그라민 은행이 이제는 스스로 운영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그 모델의 효과는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죠. 그라민 은행의 성공요인을 배움과 동시에 그것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성공할 수 없겠다는 교훈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의 성공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시진 않았나요.
그 시기에도 제가 확신을 놓치 않고 있었던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었어요. 한국의 상황에 맞게 모델을 수정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 뿐 서민들을 위한 금융의 필요성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죠.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1999년 당시 외환 위기의 타격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경기가 급격히 침체되어 있었는데,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무분별하게 신용카드 발행과 소비를 부추기고 있었어요. 담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서민들은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신용카드에 점차 의존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요. 뿐만 아니라 은행에서는 담보와 보증 없는 서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아, 대부업체나 사채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졌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크로크레딧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 맞는 솔루션 개발이 가장 큰 과제였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 적합한 마이크로크레딧 모델은 무엇일까 고심을 하던 끝에, 사후관리 컨설턴트(RM, relationship managr) 도입을 솔루션으로 찾았습니다. 이 RM 서비스는 단순히 대출만 해주는 게 아니라 고객들에게 담당 전문가를 한 명 씩 붙여줘서, 쉽게 말하자면 ‘망할 틈새를 안 주겠다’는 거에요. (웃음) 예를 들어, 음식점을 시작하는 고객에게 사업 초기 자금을 대출해 준 경우라면 은행에서 담당자를 정해 대출을 제외하고도 가게 입지, 내부 인테리어, 조리법과 메뉴 개발과 같은 사업 컨설팅 등 이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대출자들이 상환에 실패하면 돈을 빌려준 은행도 같이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출자와 RM 은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가 됩니다. 그라민 은행처럼 대출자들 사이에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은행과 고객이 동반자로서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이 한국에 적합한 마이크로크레딧 모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RM 제도는 실질적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나요.
운영해 보니 80%는 생존하더라고요. 그런데 집중적으로 관리를 하는 만큼 유지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요. 사회연대은행에서 운영비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죠.
그렇게 사회연대은행의 모델을 만들어가게 되신거군요. 하지만 한국에서 전에 없던 사업 분야를 개척해 나가시면서 겪어야 했던, 사업 초기의 어려움도 있었을 거라 짐작됩니다.
정부와 금융감독원에서 ‘은행’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공식 명칭을 사회연대은행 대신 ‘함께 만드는 세상’으로 인가를 받았고요. 웨스트팩 한국 지사, 웨스트팩 인도네시아 합작 은행, 캄보디아 은행에 이어서 제가 네 번째로 설립한 은행이었죠. 그동안의 자본금 중 가장 적은 액수인 5천만 원으로, 사무실도 없이 시작했어요. (웃음) 직원들 월급, 사무실 임대료 등 운영 자금에 쓸 돈이 늘 부족했죠.
기부만으로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사회연대은행의 첫 대출에 대한 기억도 강하게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2003년 5월 사회연대은행에서 처음으로 대출을 했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에 삼성에서 여성가장의 창업을 위해 10억 원을 우리 은행에 기탁했어요. 우리는 조건없는 현금 지원은 빈곤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부 대신 대출을 고집했어요. 하지만 당시의 삼성 역시 좋은 일에 쓰려고 내놓은 돈인데 상환을 조건으로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죠. 합의를 본 것이 대출금을 전액 상환시 대출자들에게 인센티브로 상환금의 절반을 돌려주자는 안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삼성의 10억 덕분에 여성가장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대출을 할 수 있었고 놀랍게도 대출금을 모두 상환받아서 절반을 격려금으로 돌려줄 수 있었어요.
기부만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기부가 필요한 대상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는, 노동 능력을 아예 상실한 사람들도 있어요. 이들에게는 일방향적으로 주는 복지가 필요하죠. 하지만 약간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아직 가지고 있는 사람들, 즉 전통적인 복지의 수혜자층과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이들 사이의 애매한 경계선이랄까, 회색 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지원하는 최종 목표는 이들의 자활의지를 감퇴시키는 것이 아닌, 이들의 능력을 키워 시장에 편입시킴으로써 결국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죠. 마이크로크레딧은 바로 이러한 이들을 위해 필요한 금융이고요.
최근에 대두한 생산적 복지, 투자적 복지의 흐름과 사회적 금융(social finance)도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될까요?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복지 이슈가 주요 아젠다로 떠올랐고 동시에 재원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복지 영역에 정부 예산이 100조 이상 투입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 지원 대상별로 복지의 관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는데 투자적 시각보다는 시혜적 시각으로 복지를 보는 입장이 아직 강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효과가 빨리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2012년 말까지 사회연대은행의 누적 집계를 보니 누적 대출액이 약 320억 원, 업체 수가 1,653개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어떤 요소가 성공적인 창업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교훈을 얻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심사를 할 때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 사람이 정말 가난한가’라는 요소인데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은행이기 때문에 시중 은행에서 자금을 구할 수 있는 이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죠. 두 번째 기준은 ‘사업 아이템이 비즈니스로서 성공할 수 있는가’ 입니다. 창업 자금을 위주로 대출을 하는 저희 입장에서는 과연 대출자가 계획하고 있는 아이템이 사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만 하죠. 사업이 망하면 당사자도 그렇고 은행도 같이 망하잖아요. (웃음) 하지만 앞의 두 가지 기준보다 훨씬 중요하게 보는 요소는 바로 ‘자활 의지’ 입니다. 약 10년 동안 1,600여 군데 업체를 대상으로 대출해 보니 본인의 자활 의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더라고요.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일어서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비록 시간은 더딜지라도 결국 성공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자활 의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가 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서류만으로는 절대 파악할 수 없고요. 사람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단시간에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일주일 정도 함께 일해보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대출자가 희망하는 사업 아이템과 관련하여 저희가 직접 교육 기회를 연결해주기도 해요. OJT(직장 내 교육훈련) 등의 방법을 쓰는 거지요.
정부, 기업, 민간의 강점을 중심으로한 역할 분담 중요
사회연대은행을 운영하시면서 가장 큰 고민은 어떤 게 있으셨을까요.
사회연대은행을 운영하면서 항상 저를 괴롭히던 숙제는 대출금을 위한 재원 마련이었어요. 고민을 거듭하던 중 우연히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죠. 국민들이 은행에 예금을 하다가 액수가 얼마 안 되어 찾아가지 않고 있는 돈, 휴면 예금의 규모를 보니 4천억 원이 넘는 거에요. 휴면예금이 다른 목적 사업에 기금으로 활용된 사례는 이전에 없는 것 같았어요. 마침 국회에서 열리는 ‘서민금융지원대책과 사회연대은행 제도화를 위한 공청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기에 휴면예금을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의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죠.
다른 사용 용도를 마련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돈을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쓰자는 제안이었기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발표를 하자마자 공청회장이 술렁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것만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어요. 휴면예금을 고객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요. 제안이 난항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던 때에, 2006 년 당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유누스 박사가 방한하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도 성사가 되었고 저 역시 그 자리에 배석하였는데 유누스 박사를 통해서 휴면예금에 대한 법안을 대통령에게 운을 떼 달라고 은근슬쩍 이야기를 했죠. (웃음)
대통령에게 직접 제안을 했으니 이후에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것 같은데요.
무섭게 속도가 붙었죠. ‘휴면예금관리재단 설립 등에 관한 법률’이 2007년 7월에 통과됐고, 2008년 2월부터 시행하기로 했죠. 이때 휴면예금을 운영할 관리 재단도 독립적으로 생겼습니다. 저는 휴면예금관리재단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에요.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한 민간기관이 주도하고 정부는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을 때 가장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데 정부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죠. 2009년에 휴면예금관리재단은 미소금융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에 마이크로크레딧을 도입하면서 노하우와 경험을 쌓아온 민간 기관의 목소리는 아쉽게도 외면받았어요.
그동안 민간 마이크로크레딧 기관에서 정부 지원 예산의 도움을 받아왔을텐데 정부에서 직접 주도하는 사업이 따로 나타나면서 민간 기관들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 같습니다.
미소금융으로 시중의 돈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사회연대은행도 재정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대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이 미소금융에 기금을 출연하느라 우리 은행에 기부할 수 있는 돈은 상대적으로 적어진 거죠. 연 100억 원 가까이 이루어지던 대출 집행이 2011년에는 1/4 수준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더욱 안타까웠던 점은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딧으로 유명세를 모으며 출발한 미소금융이 ‘가난한 이들의 자활을 위한 금융’이 아니라 일반 금융 상품 중 하나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반 금융 상품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미소금융에서 사회연대은행에 자금 지원을 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대출상환율 95% 달성, 지원액의 2%는 예치, 운영비는 지급 불가 등의 조건을 내걸었어요. 운영비는 이자 수입을 통해서만 충당해야 했고요. 당시 사회연대은행의 누적 상환율이 80% 선이었는데 95%로 그 비율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훨씬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해서 대상자를 선별하거나 시중 은행처럼 담보를 잡아야 했죠. 이것은 근본적으로 마이크로크레딧의 취지와 정신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무담보 무보증의 상태로 벼랑 끝에 있는 서민들에게, 자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 마이크로크레딧의 기본 목표인데 말이죠. 그리고 돈을 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돈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교육, 컨설팅 등과 같은 종합적인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어야 하는데 그 기능 역시 미소금융에서는 많이 약화되었고요.
한국사회투자에서의 새로운 출발
사회연대은행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신 후 한국사회투자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한국사회투자가 운용 및 수행을 맡고 있는 서울시 사회투자기금은 복지, 환경, 문화 등과 관련한 다양한 사회적 과제를 투자, 융자의 방법으로 자금을 선순환시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회투자기금은 서울시에서 500억, 민간에서 500억을 출연해서 민관이 함께 만드는 기금으로, 시장의 원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정부와 시민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지 않으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접근을 취합니다.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과 같은 사회적 배려기업에 투자, 융자를 지원하거나 자살예방, 노숙인 감소와 같은 사회 현안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성 있는 사업 수행 민간단체에 사업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죠. 또 주거 취약계층 거주 문제를 위해 건설 프로젝트의 운영, 건설 자금 융자를 제공하는 것도 주요 사업입니다. 사회 문제, 복지를 시장의 방법으로 해결해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사모사채, SPC 등을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연구 중이에요.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지원 대상이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한국사회투자에서는 사회투자기금을 통해 조직이나 기업 프로젝트에 투자를 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핵심 사업 중 하나도 사회적기업 지원인데요. 현재 사회투자기금의 주요 피투자 대상인 사회적 기업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고 계신가요.
2007년도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만들어졌고 현재 인증을 받은 사회적기업이 800여 개소가 넘습니다. 양적으로 팽창하긴 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기업이 나타나는 풍토가 조성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소셜 미션을 명확히 하고, 이를 추구하기 위한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된다면 사회적기업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럴 때 다양하고 창의적인 조직 형태가 나타날 수 있는데 현재의 사회적기업들은 그 모습이 획일화되어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이제 정책 결정자들도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투자기금은 ‘금융’을 통해 건강한 사회적기업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데요. 더 나은 생태계 조성을 위해 개선이 필요한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자본 조달은 생태계 조성을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사회적기업을 위한 자본시장을 조성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죠. 그런데 현재 사회투자기금은 사회적기업을 대상으로 대출 밖에 할 수 없어요. 투자는 상환 의무 없이 기업에서 성과가 발생하면 배당과 같은 형태로 수익을 받고, 대출은 특정 기간이 지나면 원금을 갚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지원인데 사회적기업을 살펴보면 대출이 필요한 곳도 있고 투자가 필요한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제도적 환경은 사회적기업에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악용할 것이란 우려 때문에 이 통로를 막아놓은 건데 이 문제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험은 특별법으로 방지하고, 사회적 금융이 투자도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본 조달의 공급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한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수요자 측면, 즉 자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기업 쪽에서도 개선되어야 할 점은 없을까요.
사회적기업 생태계를 위한 자본 시장이 정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회적기업의 투명한 운영입니다. 투자의 기본 메커니즘은 자본과 오너십의 교환이에요. 자금을 제공하고 그 자금 운용을 통한 수익을 위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투자자는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회적기업은 일반기업과 달리 겪는 특수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투자자가 사회적인 성과보다 재무적인 성과를 우선시하려고 할 때 갈등이 일어날 수 있죠. 하지만, 투자를 받는다면 경영권 간섭은 피할 수 없는 문제에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준비는 갖추지 않은 상태로 투자만을 바라는 태도는 모순적이라고 봅니다. 장기적으로 사회적기업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업 정보를 보다 더 투명하게 공개하고 투자자에게 운영권도 맡길 수 있는 혁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금융 섹터에서 먼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대표님의 개인적인 비전, 그리고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스티글리츠 박사가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라는 개념을 얘기했어요. 특정 구성원들에게만 혜택이 치우친 성장이 아닌,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함께 이끌고 나아갈 수 있는 성장이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이죠. 저는 현재 우리 사회가 너무나 분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좌우, 진보와 보수, 남과 북으로 사회가 나뉘어 있고 공동체 정신도 너무 약해요. 동시에 이러한 분절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막대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분열의 ‘나눔(divide)’과 공유의 ‘나눔(share)’이 모두 같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참 흥미롭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분열을 꿰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한국사회투자가 꿈꾸는 사회적 금융 역시 파편화되고 서로 유리된 사회의 부분들을 이어나갈 수 있는 통합과 화해의 자본입니다.
Epilogue
“금융은 인간의 활동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미국의 금융위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이 언젠가부터 금융은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소수의 집단만이 혜택을 받는 금융 상품이 발달하고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국민들의 세금으로 구제해주는 금융은 지속가능하지 않아요. 사회의 상층부를 대상으로 하는 금융이 제대로 작동해야 하고, 동시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낮은 곳의 금융 역시 순기능을 하면서 공존해야 합니다. 다행히 외국 사례를 보면 경제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사회적 금융을 실천하고 있는 기관은 꾸준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어요.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금융을 회복하기 위해 장기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종수 대표는 이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 온 베테랑 답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본연의 기능을 잃어버린 금융 섹터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였다.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을 찾고, 직접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그 중 얼마나 될까. 일생 동안의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고, 그 보다 먼 여행이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너무나 흔한 클리셰이지만, 진부해질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른 것은 그만큼 그 멀고 힘든 여행길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로 이르는 여행 역시 늘 더 낮은 곳으로 임하는 길일진대, ‘상선약수’, 낮은 곳을 찾아 흘러내리는 물을 매일 생각한다는 이종수 대표는 어쩌면 이 멀고 지난한 여행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성: 이선화 (IBR 편집부 fika0405@impactsquare.com)
취재 및 정리: 이선화, 박혜린 (IBR 편집부)
촬영: 이태열 (베네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