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콩이 틔우는 변화의 싹: 해피빈 재단 권혁일 대표

2013. 2. 26. 13:56

본 글은 Impact Business Review 3월호에 실린 [People] <연두색 콩이 틔우는 변화의 싹: 해피빈 재단 권혁일 대표> 인터뷰 기사 전문을 IBR 편집부의 동의하에 실은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Prologue

국내 검색엔진 점유율 순위에서 모든 후발 주자들의 몫을 합해도 선두자리를 여유롭게 지키는 대한민국 대표 포털 네이버.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연두색 검색창이 깜빡이는 화면을 찾는 모습이 전혀 어색할 것 없는 우리에게 네이버는 뉴스, 영화, 지도, 카페, 블로그, 책, 웹툰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가진 보물창고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네이버를 이용하면서 “기부할 수 있는 콩 x개를 받았습니다.” 라고 모니터 화면에 불쑥 튀어나오는 메시지를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해피빈 권혁일 대표의 ‘찌르기’에 무방비 상태로 당한 사람들이다. “1990년대 말 직장 동료와 함께 모 대기업의 사내 벤처로 시작한 IT 서비스를 오늘날 네이버로 만든 숨은 주역”을 그의 첫 번째 성공으로 요약한다면, 현재 그는 새로운 도전으로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묵묵히 써내려가고 있다. “기부가 일상이 되는 날을 보고 싶다”는 사람. 네이버 온라인 기부포털 커뮤니티 해피빈의 권혁일 대표를 만났다.

 

한국 기부 문화의 허와 실

어떠한 계기로 국내 대표 포털의 창업 멤버에서 해피빈 재단의 대표로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공대를 졸업한 개발자 출신입니다. 네이버의 창립멤버로 6~7년을 보내고 당시 네이버 재팬을 맡아 일본을 오가며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의 내 삶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무리해서 일하느라 건강까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던 때인데 막연하게 NGO 쪽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거둔 성공을 세상에 되돌려 주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네이버가 2002년에 상장을 하면서 사회공헌을 시작했는데 네이버 밖에서 출발하기보다 네이버의 플랫폼 안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관련 부서에 지원했고 전권을 위임받아 시작하게 된 거죠.

엔지니어링에서 필란트로피 세계로 옮겨 오시면서 새로운 영역에 적응하기 위한 시행착오의 기간 역시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무작정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기간이 저에게는 우리나라 사회공헌의 허와 실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코어(core)라고 할 수 있는 속의 모습은 실제로 너무나 다르더라고요.

겉과 속의 차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한국사람들에게는 정(情) 문화가 있어서 기부에 인심이 후할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정(情)에 호소하지 않으면 기부가 안 돼요. 단적으로 거의 죽어가는 아이를 방송에 내보내지 않으면 모금이 안 되니까 그런 극단적인 이미지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결식아동 돕기 모금 운동을 벌여 큰 액수의 돈을 모아도 정작 해당 지자체 내 수혜 아동은 찾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하는 거에요. 결식아동은 사실상 우리나라에 없다고 보면 됩니다. 문제는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보살펴줄 수 있는 부모가 없다는 것이죠. 감정에만 호소하는 얕은 기부 문화는 문제의 핵심을 뚫어 보지 못하게 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자선만 반복하게 해요.  

지적하신 문제점은 현상을 제대로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조달하지 못하는 중간 조직에서 일부 기인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요.  

자선을 정치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세요. 국민이 깨어 있어서 시민으로서 의사를 적극 표현하고 투표에도 열심히 참여한다면 좋은 정치인들이 나오고 좋은 정치가 이루어질 겁니다. 기부와 나눔도 마찬가지죠. 대다수의 사람이 기부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잘못된 관행들이 고쳐지지 않는 거에요. 불쌍한 아동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공익광고의 경우 기업은 자신의 이익에만 들어맞는 내용의 광고를 주문하게 되어 있고 이 광고를 만드는 사람 역시 자신의 재량이 맡겨진 범위 안에서 최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이들을 비판할 수는 없죠. 중요한 책임은 바로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심을 두고 중간조직들이 올바로 운영되는지 감독해야 하는 대중들에게 있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대중들이 ‘깨어있는’ 것이 제일 우선으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것을 풀뿌리, 쉬운 말로는 ‘밑바닥’의 문제라고 표현하는데요. (웃음) 이 바닥이 탄탄해야만 좋은 사회공헌과 좋은 나눔 활동이 발달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해피빈 역시 그러한 풀뿌리의 중요성을 기반으로 시작하게 된 건가요?

그렇죠. 아래에서부터 기부 문화를 바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보았습니다. 당시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부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돈이 없어서,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비영리조직을 믿을 수 없다는 투명성 때문이더군요. 저는 두 번째 문제를 온라인 기부 플랫폼에서 비영리와 사용자를 직접 연결하고, 기부자들의 기부금 내용을 피드백 루프를 통해 보고받을 수 있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네이버라는 거대한 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해서 온라인 기부 포털을 만들면 투명성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 봤던 거죠. 그렇게 해피빈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비스를 2005년 시작했을 당시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한데요.  

제대로 뒤통수 맞았죠. (좌중 웃음) 서비스를 시작하고 한 달 뒤 결과를 보니 예측했던 것과 아주 다른 흐름이 읽히더군요. 투명성, 피드백, 커뮤니케이션 이런 게 진짜 원인이 아니었어요. 아예 한 달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에요.

내가 불우이웃이라는 80%

비영리를 신뢰하지 못해서 기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말이 실제와 다르다는 건가요?

우리나라의 기부자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에서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사람들이죠. 자원봉사도 하고. 나눔이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에요. 대한민국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1%?

1% 미만이에요. 두 번째 부류는 기부에 수동적인 사람들입니다. 방송이나 특별한 이벤트를 접할 때만 주머니를 여는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10%를 웃도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로 후하게 쳐서 이들을 20%라고 한다면 나머지 80%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불우이웃을 도웁시다’는 구호에 ‘내가 불우이웃이오.’라고 답합니다. 한마디로 기부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무관심한 사람들이죠. 해피빈 서비스를 한 달 동안 운영하고 나서 얻은 깨달음이 이거였어요. 온라인 공익 포털은 트래픽이 있어야 운영할 수 있는데 이 트래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집단의 풀 자체가 너무나 작았던 거에요.

그렇다면 그 이후로 해피빈의 사업 방향이 수정된 건가요?

시행착오를 통해 앞으로 해피빈이 가야 할 큰 방향을 잡은 거죠. 초반에 투명성, 피드백 활성화를 목표로 한 서비스는 수동적인 20%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들만을 가지고는 우리나라의 척박한 기부 지형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20% 만이 반응할 뿐 기부 자체에 무관심한 나머지 80%는 넘어오지 않는데 기존의 기부 플랫폼, 대형 NGO, 비영리는 계속 그나마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20%에 집착하고 있었어요. 나머지 80%를 그대로 두고서는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한 거죠. 그래서 우리의 새로운 목표를 이 움직이기 어려운 80%를 기부와 더 가깝게 만들도록 하자고 잡았죠. 이렇게 사업 계획을 수정하고 해피빈은 2006년에 새롭게 시작합니다.

자신을 자선의 수혜자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에게 기부를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새로운 사업 계획은 어떤 전략을 취하게 되나요?

기본적으로 ‘콩’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서 사람들이 커뮤니티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인프라를 짜는 데 주력했어요. 강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네이버라는 플랫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 비집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을 ‘interruption’, 우리말로 방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네이버 지식인에 자신이 작성한 답변이 질문자에 의해 채택되거나 메일, 카페, 블로그에 글을 쓰면 갑자기 알림창이 나타나면서 기부를 할 수 있는 콩을 받았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거죠. 이런 식으로 일상에 기부가 강제적으로라도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콩을 활용한 ‘방해하기’ 전략이 네이버에 순순히 받아들여졌을 것만 같지는 않은데요.   

처음 네이버 서비스에 콩을 심겠다고 제안했을 때 거절을 당했어요. 카페에 글을 쓰면 콩을 주는 서비스를 시작하자고 하니, 담당자가 원하는 사용자들에 한해서만 적용하는 선택제로 하자고 주장하는 거에요. 우리는 기부에 관심 없는 80%를 움직이는 게 목표인데 선택제로 한다는 건 안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이게 안 되면 해피빈을 접겠다는 생각으로 담판을 지을 각오로 나갔습니다. 한 달 동안 테스트를 해보니 다시는 콩을 보내는 팝업을 보지 않겠다고 선택한 사람이 500명 정도 나오더라고요. 네이버 카페의 평균 일일 탈퇴자 숫자를 고려하면 극히 작은 숫자였죠. 그래서 통과가 된 겁니다.

기부에 냉랭하던 사람들의 손에 기부하도록 ‘콩’을 쥐여 주다시피 한 거네요.

2008년까지는 계속 테스트를 거치다 2009년부터 콩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는데요. 무관심한 개인들이 콩을 받게 되면, 어찌 됐든 이 콩은 ‘나의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내 콩을 아무 데나 쓰기 싫으니 해피빈 사이트에 들어가서 여러 단체의 활동을 찾아보고 나름대로 고르고 골라 어디에 기부할지 선택하는 절차를 밟는 거죠. 모금이 완료되면 단체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그 이후부터는 돈이 없다, 비영리단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둥 이유를 둘러대던 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한 번만 어려운 문턱을 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관심을 두고 현금을 콩으로 충전해서 기부하는 사람들까지도 생겨나는 거죠.

‘스마트 시대’의 온라인 필란트로피   

한편에서는 온라인 자선을 두고 기부를 지나치게 쉬운 행위로 만든다는 우려를 비추기도 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비영리조직에 얼마씩 적립되는 식의 모금 캠페인은 참여자들이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으며 ‘좋은 일을 했다’는 가벼운 만족감만을 주는데 그친다는 비판인데요.

해피빈 서비스를 제안할 때 클릭만 하면 자동으로 기부되는 안을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희는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오프라인에서 기부가 진행되는 과정과 같게 자신이 후원할 비영리단체를 탐색하고, 그곳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콩을 기부하는 절차를 일부러 분리 만들어 놓았죠. 기부는 사람 한명 한명의 내재적인 변화로 가능하기에 해피빈에서는 그런 개인적인 경험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다 갖춘 프로세스로 서비스를 디자인했어요. 이 경우 중도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어 참여율이 낮아지는 문제는 생기겠지만 스스로 ‘기부 행위’라고 인지할 수 있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거든요. 쉬운 기부는 사람을 끌어모으기에는 편리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해요. 온라인이 안고 있는 위험은 경계하면서 저희는 동시에 온라인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도 노력하는데요. 콩을 기부한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데이터에 기반을 둬서 유저들을 계속 찌르는 거죠. 콩으로 기부하라고. 찌르는 게 싫어서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극히 소수더라고요.

데이터로 사용자들의 특성들을 분석해 보면 특정한 패턴이 나타나는가요? 나이, 지역, 종교 등의 변수가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합니다.

지역과 종교적인 요인은 분석해본 결과 큰 의미가 없었어요. 연령은 10대와 20대가 대다수죠. 최근에는 50대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른바 ‘초딩’ 유저들도 많은 편인데요. (좌중 폭소) 이 집단은 비즈니스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늘어가는 초딩 유저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곧 이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았죠. 이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면서 지속해서 해피빈 플랫폼에 머물고 기부에 참여하는 록인(lock-in) 효과가 나타나는 건 물론 심지어 부모들까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지켜보던 부모들이 함께 콩 기부에 참여하게 된 거죠. 여기에 부모들에 의해 네이버의 평판이 올라가면서 당연히 네이버 브랜드 이미지도 향상되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주요 이용자들의 낮은 연령대는 해피빈이 온라인에 기반을 둔 서비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텐데요. 모금하는 입장에서, 젊은 연령을 축으로 한 온라인 자선과 높은 연령을 축으로 한 오프라인 자선 사이에 경쟁 구도가 있다고 보시나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고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뺏어오겠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봐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성폭력 방지 캠페인을 위해 걸스카우트 초등학생들과 4천만 원 정도를 모금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프로젝트를 하면서 오프라인에서 참여한 걸스카우트 어린이들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네이버 안에 만들었어요. 이 채널을 통해서 어린이들이 자신들이 직접 참여한 모금과 기부 활동에 관해 이야기를 지속해서 나누면서 꽤 활발하고 끈끈한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있더라고요. 이걸 보고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사람들을 건너오게 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필요하지 이 두 영역을 대립관계로 보는 시각은 잘못되었다고 봐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비영리단체가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SNS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듣습니다. SNS의 중요성이 과잉평가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비영리단체가 SNS에 둥지를 만들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에요. 이견이 없죠. 한때 개인 홈페이지 만드는 게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곧 블로그로 다 넘어왔어요. 왜 그랬을까요? 블로그는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유저들 사이에 커넥션을 만들어내기 훨씬 쉽고 조직이 네트워킹 파워를 갖기에도 홈페이지보다 블로그가 훨씬 유리하죠. SNS도 마찬가지예요. 네트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도구가 나타난 겁니다. 하지만 네트워킹 파워를 만드는 게 쉬울까요? SNS 계정을 만들어 놓는다고 네트워크 효과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잖아요. 핵심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어떻게 내놓느냐는 접근 방법이 더 중요한데 이걸 하려다 보니 일반 비영리단체는 SNS 관리 한 달 해보고 다 뻗어버려요. 사람들이 관심을 둘 만한 일반 콘텐츠에 기부의 옷을 입혀서 내놓아야 하는데 기부 콘텐츠만으로는 승부를 보기 어렵거든요. 그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곳이 많지는 않죠. 그리고 카톡 친구, 페북 친구 숫자를 늘리는 것 만이 답이 아니에요. 작은 조직 같은 경우 오히려 팔로어 숫자를 늘리기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핵심 후원자를 발굴해내는 게 중요한 거죠.


기업의 입장을 고려한 제안서 들고오는 비영리 찾아보기 어려워

해피빈을 시작할 당시와 비교했을 때 국내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기업의 변화도 많이 체감하실 것 같은데요.

당연히 느끼죠. 사회공헌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학습 속도는 매우 빨라서 과거에는 한창 퍼주기식 자선을 시도하다 현재에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단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영리가 이 니즈를 채워줄 새로운 사업을 들고 오지 못하니 기업들이 답답해서 내부적으로 사회공헌팀, 재단 등을 만들어서 직접 사업을 하고 있어요. 기업의 니즈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비영리와 그렇지 못한 비영리의 격차 역시 커지고 있고요. 역량이 되는 비영리는 기업과 파트너십을 잘 조직해서 사업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잖아요.

변화의 적응 속도 측면에서 본다면 비영리가 기업에 비해 느리다는 말씀이신가요?

비영리가 기업에 가져오는 제안서의 내용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다 똑같아요.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사업에 참여하면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가 좋아질 거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기부하라’는 논리가 다죠. 기업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고려하는 제안서는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워요. 기업은 지금 기부금이 어떠한 (사회적) 성과로 이어지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건드리는 비영리는 없거든요. 자원 활용 측면에서는 기업이 직접 사업을 하는 것보다 파트너십을 맺는 게 더 효율적임에도 왜 굳이 기업이 직접 사업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고민하지 못하는 거죠.

이러한 간극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보시나요.

기본적으로 비영리 섹터의 바탕이 되는 사회복지와 영리 비즈니스 사이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이 문제는 비영리와 일반 기업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기업 섹터에서도 똑같이 관찰된다고 봐요. 혹시 사회적기업 할 생각 있으세요?

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닌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젊은 사람들이 사회적기업 한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봅니다. 일반 벤처를 창업해도 성공할 확률이 5%도 안 되는데 사회적기업은 재무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가치까지 창출해야 해서 영리 기업보다 성공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요. 비즈니스를 모르는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과 선한 마음만으로 사업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죠. 기업이 있고 난 후에 사회적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사회복지 섹터는 비즈니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비즈니스 섹터의 사람들이 사회복지 쪽으로 넘어오기에는 이 시장이 현재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간극이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어요.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권혁일 개인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해피빈을 중점적으로 이끌어 달라는 요청도 사회복지와 비즈니스의 이분법에서 생겨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렇죠. 저는 절대로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를 바꾸어 놓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은 있지만, 해피빈 사업을 할 때에는 제가 네이버에서 얻은 기업가적인 경험을 활용하고 논리와 이성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합니다. 저는 이 필드를 보면 바꿀 것들이 너무나 많이 보이는 기업가예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가 ‘한국의 기부전도사’, ‘천사처럼 선한 사람’으로 비취기 시작하는 거에요. 난 그런 사람 아닌데.(좌중 폭소) 비영리 일을 하면 무조건 착하고 좋은 일 한다고 보는 고정관념은 사회복지와 비즈니스의 간극을 더 크게 만들기 때문에 제 개인에 초점을 둔 인터뷰는 가급적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영리/사회복지 섹터에 인재들이 유입되지 않는 게 이 시장의 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이 영역의 매력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지원을 바라면 안 돼요! (웃음) 기본적으로 정책적인 규제는 풀어야 할거고요.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첫발을 디딜 수 있는 관문을 호의적이고 긍정적으로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지원이라는 건 이 과정에서 부족한 게 생기면 채워주는 보완적인 역할에 머물러야겠죠.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기’ 위한 수단, 미디어

그 첫 단추를 채워주는 역할을 어디에서 기대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그 기반을 만드는 게 바로 미디어에요. 미디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에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면 모두 미디어에요. 초코파이의 빨간 봉지에 메시지를 담을 수 있으면 그것도 미디어의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데 방송 미디어와 포털을 활용한 미디어에는 차이가 있어요. 방송에서 모금 프로그램 하는 거 보셨죠? 방송 시간이 언제던가요? 사람들이 제일 안 보는 시간대에 편성되어 있어요. 공익적인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을 방영해야 하는 할당제가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는 거거든요. 기업한테 제작비를 받고, 광고를 붙이고, 스토리를 내고, 그래도 시청률 안 나오니 가수들이 중간에 나와서 노래하고, 사회자가 진행하는 이런 패턴이죠.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포기하는 제살깎아먹기에요. 그런데 방송사도 영리기업이기 때문에 비난만 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네이버와 해피빈은 기존 방송과 어떻게 다른 미디어인가요?

포털의 목적은 사용자를 늘리는 데 있죠. 해피빈이 잘되려면 네이버도 잘되어야 하고요. 네이버와 해피빈은 이런 포털이라는 속성 때문에 사업을 열심히 할수록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돈독한 공생 관계의 구조로 짜여 있어요. 네이버 지식인, 카페, 블로그, 뮤직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수많은 유저들을 생각해봐요. 네이버의 이러한 재미있는 콘텐츠를 활용해서 공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채널을 계속 만들어내면 기부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힘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필드에서 나오는 흐름을 큐레이팅해서 보여주는 게 해피빈의 역할인 거죠. 나중에는 로그인만 해도 콩이 생길 수 있는 기능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미디어를 활용해서 공익, 나눔 영역에 얼마나 큰 흐름을 만들어내느냐가 핵심인데요. 특히 올해 2013년은 콘텐츠를 미디어와 연계시키려는 계획을 주요 목표로 잡고 있어요. 공익 콘텐츠가 아니라 재미있는 콘텐츠를 내보내고 그 아래에 기부와 나눔에 참여하는 방법을 덧붙이는 거죠. 이렇게 사람들의 삶을 파고 들어가서 기존의 콘텐츠에 공익적인 요소를 더할 때 80%의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 거고 이때 비로소 나눔과 공익을 각광 받는 산업 분야로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처음부터 공익 콘텐츠로만 접근하면 20%만 반응하고 끝나잖아요. 네이버와 해피빈은 이 80%를 공략할 수 있는 미디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는 해피빈의 핵심 자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피빈 사업 영역을 가두는 한계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요.
네이버는 어디까지나 해피빈이 레버리징을 하는 출발점이지 한계로 작용하는 틀이 되어 버리면 안 되겠죠. 쉬운 예를 들어보죠. 지난해 모 은행의 임직원 기부 참여 캠페인을 위해 해피빈 인프라를 제공했어요. 은행 인트라넷에서 직원들이 쉽게 펀드레이징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준 것이죠. 참여한 직원들은 1년 동안 자신의 기부 활동 리포트도 받아볼 수 있었고요. 그런데 여기에는 해피빈 로고나 “powered by 네이버” 같은 표시를 전혀 안 했어요. 우리는 기부를 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해서 기부를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되는 거였지 해피빈이나 네이버를 드러낼 필요가 전혀 없었거든요. 해피빈이 구축한 시스템은 사회가 함께 쓸 수 있는 공공 자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네이버가 해피빈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는 울타리가 될 거라는 우려는 기우인 거죠. 아, 제가 게임 폐인인데요. (웃음)  한번 시작하면 무조건 끝장을 봐야 합니다. 한번은 RPG 게임에서 사냥할 때 받는 아이템을 보면서 이 아이템을 기부할 수 있는 판을 짜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아이템을 기부하면 능력치를 줘서 사람들이 기부를 더 하고 싶게 하는 거죠. 해피빈의 API를 오픈소스화하면 게임 캐릭터로 기부하는 게 가능할 텐데 이걸 우리나라 게임 회사들에게다 제공하고 싶어요.

제가 게임을 하지 않아서 그 설명은 조금 어려운데요.
사람은 게임을 해야 하는데! (좌중 웃음)

숙제를 빨리 끝내고 싶다

5년 뒤 해피빈의 비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전 사회복지와 나눔 영역이 각광 받는 분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쪽은 무조건 착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진정성만 있으면 된다는 인식이 없어졌으면 좋겠고요. 여기에서도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잖아요. 사회복지 영역에 왜 남자가 많이 없을까요? 가장으로서 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쪽에서 비즈니스와 혁신이 일어나고 인재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거에요. 저는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해피빈이 하길 바라고요.

기부 문화의 토양이 척박한 곳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여기까지 오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시작 안 했을텐데... (좌중 웃음) 누구는 해외의 비슷한 온라인 기부 플랫폼을 해피빈이 따라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도 말해요. 해피빈 서비스만을 보자면 비슷한 사례를 충분히 외국에서도 찾을 수 있죠. 하지만 나라마다 기부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되죠. 영국에서는 만 원을 기부하면 거기에 드는 수수료를 국가가 부담해주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요. 기부 섹터의 파이가 워낙 크니까 이러한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즈니스가 자연스레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파이의 확장은 따지고 들어가 보면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모여야 새로운 패턴이 나오는 거죠. 앞서 얘기한 무관심한 80%를 이쪽으로 끌어오지 않으면 우리는 물가 상승률에만 맞추어 기부금이 늘어나는 기부 후진국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어요. 한국 국민은 열성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티핑포인트로 넘어갈 수 있는 방아쇠, 트리거만 잘 당겨 준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기부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트리거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쉽게 말해 기부나 나눔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 “너 그거 안 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되는 거에요. 이렇게 지인들에 의해 한명 한명씩 관심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부가 일상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대다수로 확대되는 거죠. 그때에는 해피빈에서 소화할 수 있는 좋은 내용만 큐레이팅해서 내보내 주면 저절로 시장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해피빈에서 이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한 시간이 1년 정도 남았다 보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거기까지가 해피빈에서 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하고요.

구체적인 수치를 목표로 두고 계신 건가요?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저 나름대로 정성적인 목표와 근거가 있어서 그때가 오면 제가 느낄 수 있을 거에요. 해피빈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모두 “될까?”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된다, 다만 시간의 문제다”라고 우리 내부에서도 시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제게 주어진 숙제를 끝내고 빨리 놀고 싶어요. (웃음)
 

Epilogue

인터뷰가 끝난 후 취재진은 해피빈 재단 건물 근처의 식당으로 장소를 옮겨 그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끝낸 취재진이 ‘인터뷰어’보다 ‘멘티’의 자세로 던진 질문에 그는 ‘인터뷰이’보다 ‘멘토’의 입장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이 분야에 뛰어들어 활동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30대, 40대가 되면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성공도 거두고 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바람도 드러냈다.     

분명 그는 숙제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연두색 해피빈 콩이 싹을 틔우고 무성한 잎을 뽐내는 나무로 자라기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숙제를 어서 끝내고 싶다고. 그런데 사석에서도 후배들을 위해 조언과 격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 아까워하지 않는 권혁일 대표에게 있어 숙제는 ‘마지못해 해야 하는 괴로운 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의 숙제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학창시절의 그 ‘숙제’와는 조금 다른 의미가 아닐지.

작성: 이선화 (IBR 편집부 fika0405@impactsquare.com)

취재 및 정리: 이선화, 박혜린 (IBR 편집부)

촬영: 이태열 (베네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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