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랭크] 공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만든다. 

지역 활성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정주 인구’, ‘관계 인구’를 늘리는 것을 중요한 당면과제로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정주하고 관계할 때 필요한 공간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고민이 많다. 하지만 어떤 공간들은 야심차게 만들어진 것이 무색하게 금방 그 효용을 잃고 잊혀지기도 한다. 이번 인터뷰는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로컬에 진정으로 필요한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만들어가는 블랭크의 문승규 대표를 모시고 철학과 그 노하우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글>


블랭크는 영주, 남해, 여수, 제주, 속초 등 다양한 지역의 빈 집을 찾고, 새롭게 재탄생시켜 제공하는 빈집 큐레이션 플랫폼 ‘유휴’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러나 전국팔도를 누비는 블랭크가 처음으로 둥지를 튼 곳이 서울 동작구의 상도동이라는 것을 들으면 누구나 그 시작과 계기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블랭크는 어쩌다가 사업을 시작하고, 전국의 빈 집을 찾아다니는 기업이 되었을까?

건축가를 꿈꾸던 청년, 공간에 영혼을 불어넣는 ‘Key’를 찾다

문승규 대표는 건축학을 전공했다. 중학생 때부터 공간을 설계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에 매력을 느껴 차곡차곡 꿈을 키워온 결과였다. 하지만 5년 간 건축학을 전공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건축이라는 게 단순히 건물만 잘 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은 공간을 잘 디자인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어떤 공간들은 지어지고 난 뒤 막상 잘 사용되지 않은 공간이 많기도 하고, 그 공간이 지역이나 도시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짓고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그러다 도시 설계 관련해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면서 공간과 도시, 그 속의 사회와의 유기적인 연결성 등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던 찰나,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매년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마을만들기공모전을 본 것이다. 건축학, 그리고 도시설계 전공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공모전이었다. 그는 동료 대학원생들과 팀을 이뤄 어느 지역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고, 그러다 상도동을 만나게 되었다. 

서울의 여러 지역을 탐색하고 분석하다보니 상도동만의 특징이 툭 불거졌다. 상도동은 도심에 있으면서도 주요 거주층이 주로 나이든 주민들이었고, 그러다보니 젊은 사람을 위한 가게나 기반 시설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이었음에도 커뮤니티가 활발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 도서관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 운영하고 있다거나 아이들 방과후 교실을 삼삼오오 힘을 모아 운영한다거나, 혹은 이주여성 커뮤니티 등이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낯설면서도 신기했다”며 “저층주거지들 사이로 보이지 않게 활력을 지닌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그런 커뮤니티는 어떻게, 왜 생겨나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궁금증이 생겨난 이후 상도동이라는 지역을 좀 더 깊이있게 조사하게 되었고, ‘유휴 공간’에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직접 듣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지역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건축가로서의 역량을 살린 건축 영역과 활력을 불어넣는 커뮤니티를 결합한 사업을 해보고 싶어 지난 2012년 블랭크를 창업하게 되었습니다.”

상도동에 위치한 ‘공집합’의 시그니처 사인 앞에 선 문승규 대표 ©임팩트스퀘어

부엌으로 시작한 공유 공간이 주택으로 넓어지기까지 

블랭크는 건축사 사무소이고, 건축이라는 것은 고객이 있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인데 개소 초기부터 바로 일을 수주해 진행하는 것이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일을 맡기는 사람이 아직 없다면, 우리가 하고 싶었던 거, 우리의 지향 방향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거, 그거부터 해보고 있자 이런 생각으로 공유 공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간을 만들고 나니, 지역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역민 분들을 더 밀접하게 만나고 싶어졌다고 했다. 블랭크가 꿈꾸는 ‘커뮤니티’의 첫 시작이었다. 첫 번째 커뮤니티 컨셉은 ‘공유 부엌’이었다. 사무실을 만들면서 한 켠에 큰 부엌을 만들어두고 주민분들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와서 밥을 먹거나 요리를 하고, 관련해 소모임을 할 수 있는 실험적인 커뮤니티였다. 그는 “일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온 분들은 각자 밥도 해 먹어야하고, 가끔은 가볍게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마치 부담없는 사랑방처럼 누구나 편히 드나드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운영하다보니 저희에게도 지역민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가 되었다”고 말했다. 

블랭크는 당시 공유부엌을 찾던 지역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활 지역의 주민들이 가지는 ‘공간’에 대한 니즈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통근을 하는 분들 외에도 카페에서 홀로 작업하시는 분들이 많이 찾아주셨는데, 이 분들의 경우 함께 일하는 공간에 대한 니즈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자연스럽게 공유 부엌 다음으로 공유 작업실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후의 비즈니스도 유사한 흐름으로 확장되었다. 일 중심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운영해보니 이번엔 주거가 걸린 것이다. 부엌에서 시작된 커뮤니티가 자연스레 공유 주택으로까지 확장되어서 쉐어하우스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부엌, 작업실, 주택) 커뮤니티를 지역 안에 만들고 운영해보며 블랭크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비즈니스에 대한 전체적인 비전의 모습이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블랭크가 지역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확인한 흐름이 위와 같다면, 그렇게 만난 분들이 어느 순간 지역으로 흩어져 정착하는 것을 보면서 지역 확장의 필요성과 가능성도 확인해나갔던 것 같아요. 함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던 분들이 경주, 속초 등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면서 커뮤니티의 속성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단지 어느 한 공간에 영원히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여정에 맞춰 어디서든 공간과 커뮤니티는 다시 생겨날 수 있고 그것이 지역과 지역을 넘어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방 소도시에 대해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보게 되었어요. 상도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 공유주택,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여수 복합문화공간 ‘포트타운’ 전경 ©블랭크 제공

낯선 지역들이 블랭크의 앞마당이 되기 까지

지금껏 다양한 지역을 탐색, 발굴해왔는데 지역을 선택할 때 블랭크만의 기준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에 대해 문승규 대표는 ‘지역에 어떤 커뮤니티가 있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주로 오게 된 것도 이곳에 STAXX(스택스) 커뮤니티가 있어서 온 것이었다”며 “처음 지역 확장을 했던 경남 남해 역시 팜프라라는 청년 커뮤니티가 있었다”고 말했다. 즉,낯선 지역에 새로운 공간,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 지역에 어떤 커뮤니티가 있고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를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확장에 매우 중요한 키가 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다보니 지역을 선택할 때 지역에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런 걸 사업으로 녹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건축가로서의 경험이 톡톡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승규 대표는 건축을 전공했다보니 건축적인 관점에서 빈 집을 바라본다고 했다. 전체적인 입지부터 지역 환경이나 도심지와의 접근성, 건축 관련 법규 등을 꼼꼼하게 보게 되는데, 예를 들면 주변에 고도제한이 있으면 개발이 잘 안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곳은 좀 피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혹은 처음 방문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나 직관적인 구성 등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냥 단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새 터전을 잡게 될 곳이기 때문에 인테리어나 분위기도 고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떠한 상상들이 잘 되는 집들을 집중해서 고르게 된다고 했다. 그가 건축가가 아니었다면 쉬이 파악하지 못 할 것들이었다.

“이번 영주필두의 경우, 느낌이 너무 좋아서 소유주를 수소문했어요. 빈집의 소유주를 찾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정인데, 운좋게 소유주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알고 보니 오랜 소유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드님이 상속을 받았는데,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보니 관리를 못 하셔서 2년 넘게 방치된 집이라고 하더라고요. 우연히 찾게 된 집이지만 영주의 첫 번째 ‘유휴’ 사례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서울에서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 싶어서 만났죠. 빈집 큐레이션 솔루션 ‘유휴’는 빈집을 예쁘게 고쳐드리는 대신, 무상으로 몇 년간 사용권을 받는 형식의 상호 거래를 해요. 

이전에 만든 ‘유휴’ 거점들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요. 소유주분들이 저희에게 집을 빌려준 가장 큰 이유는 집을 팔기 어려운, 아쉬운 상황들을 안고 계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살고 있지 않지만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다거나, 나중에 언젠가 은퇴를 하고 내려와 살고 싶은데 아직 그 시기가 되지 않아 방치해둔 경우들이에요. 꼭 내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자식들이 내려와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나 생각이 있다면 더더욱 팔기 어려워 하시더라고요. 블랭크는 건축 전문가이기도 하고, 다년 간의 노하우로 빈집을 멋지게 재탄생 시키고, 그 분들이 다시 오기 전까지 다시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드리며 협력 포인트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그렇게 협력이 결정되면 초기에 공간이 만들어지는 사진도 보여드리고 그래요. 그럼 대부분 만족하십니다. 이후에는 그 분들도 일절 터치하지 않으세요. 임대기간 동안은 믿고 맡기시는거죠.”

‘영주필두’의 모습 ©블랭크 제공

지난 10여년 간 블랭크가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

‘유휴’라는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고민이 있었다. 바로 이걸 한 지역에 밀집해서 만들어야할 지, 아니면 여러 지역에 거점을 다양하게 만들어야할 지에 대한 것이었다. 한 지역에 모여있는 타운이라고 하면 관리도 쉽고 운영도 쉽다는 이점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지만 결국에는 단순 한 지역만 하는 것보다는 여러 지역을 발굴, 거점을 만들고 다양한 지역을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며 커뮤니티로 실현하는 만남 그리고 연결의 가치를 구체화해나갔다. 블랭크의 무대가 남해, 여수, 제주, 속초, 영주 등 다양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확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종종 불안해지던 마음을 완전한 확신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예전에 여수에 있는 ‘유휴’ 지점에서 한 달 정도 살았던 부부가 있는데, 이 분들은 집을 소유하지 않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내는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작년에 여수에 오셔서 한 달 살기를 하시다가 외국으로 잠깐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최근에 영주 지점이 오픈한 걸 보고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고 문의를 주셨어요. 여수에서의 경험이 너무 좋아서 영주도 오겠다고 말씀주시는 것들을 들으면서 ‘이게 진짜 연결되는구나’, ‘우리 가설이 작동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라이프 스타일이 자유로운 분들이라고는 해도,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1년을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블랭크가 만들어가는 솔루션들이 누군가의 고민을 조금 더 실행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느꼈던 순간인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다양한 지역에, 다양한 빈집을 소개하는 사업 확장 욕구가 더 커지기도 했죠. 어떤 방향으로 커뮤니티 확장이 될 지 기대되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결 고리들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문승규 대표 ©임팩트스퀘어

블랭크가 꿈꾸는 로컬

꽤나 길게 이어진 인터뷰 끝에 ‘블랭크가 꿈꾸는 로컬,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지역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라는 목표의 가장 중요한 솔루션은 커뮤니티라는 생각을 한다”며 “지역은 어떤 물리적인 변화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좋은 공간, 커뮤니티 공간이 있더라도 그 지역에 대한 애착을 갖는 분들, 지속적인 관계 형성이 없다면 장기적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공간은 사람이 며칠만 없어도 바로 티가 납니다. 모든 공간에는 분위기라는 게 깃드는데 이건 건축가가 작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채우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바이브가 결국 결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분위기는 사람으로부터 나오고 어떤 사람이 공간, 지역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갈리는 것이라 생각해요. 물론 저는 건축을 하고 있지만 그 앞단의 일들, 감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블랭크는 이 공감대, 연결, 그리고 만남을 건축으로 풀어나가는 기업이고, 앞으로도 가장 잘 해낼 기업이라는 자신이 있습니다.”


글, 사진 : 임팩트스퀘어 김소선 책임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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